할머니, 할아버지라서 줄 수 있는 사랑이 따로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라서 줄 수 있는 사랑이 따로 있다
  • 칼럼니스트 최가을
  • 승인 2022.07.04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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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엄마의 방구석 심야 영화관] 벨파스트 (2021)

네 살 쌍둥이의 어린이집 선생님은 나의 친정 엄마 이름을 아신다. 하원할 때 현관에서 아이들이 거의 매일 “오늘은 박미자 할머니 집에 갈래!” 라고 외치기 때문이다. 엄마가 가까운 곳에 사셔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뵙는데도, 아이들은 열렬히 할머니를 찾는다. 1969년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에서 터진 종교 분쟁을 다룬 영화 ‘벨파스트’를 보고 뜬금없이 아이들에게 조부모란 어떤 존재일지, 나에게 조부모님이란 어떤 분들이었는지 생각하게 됐다.

북아일랜드 종교 분쟁은 9살 아이의 일상을 어떻게 뒤흔들까. ⓒ유니버설픽쳐스
북아일랜드 종교 분쟁은 9살 아이의 일상을 어떻게 뒤흔들까. ⓒ유니버설픽쳐스

9살 버디에게 벨파스트는 그의 세계 전체다. 동네 골목에서 친구들과 칼과 방패를 들고 싸우고, 학교에서 시험 점수 발표가 나는 날이면 잔뜩 긴장하며, 짝사랑하는 여자아이와 어떻게 가까워질지가 최대 고민이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가 되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런데 그 벨파스트에 개신교와 가톨릭 간 종교 분쟁이 벌어진다. 버디가 사는 동네는 천주교도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곳인데, 이곳에 개신교들이 폭동을 일으킨다. 천진하게 골목에서 뛰어 놀던 버디의 눈앞에 화염병의 불길이 치솟는다. 폭동이 시작된 1969년 8월 15일 이후, 버디의 일상은 이전과 같을 수가 없다. 동네의 평화는 깨졌다. 버디는 날마다 바리케이드를 지나 등교한다. 버디의 아버지는 영국에서 일하면서 2주에 한 번 집에 오기 때문에, 어머니 혼자 거의 내전 상태에 빠진 벨파스트에서 두 아들을 보호해야 한다. 가족의 안전이 위협 받자, 버디의 아버지는 영국으로 이주하는 것을 고려한다.

벨파스트의 치안이 위태로워지면서, 버디 가족의 생존도 아슬아슬해진다. ⓒ유니버설픽쳐스
벨파스트의 치안이 위태로워지면서, 버디 가족의 생존도 아슬아슬해진다. ⓒ유니버설픽쳐스

버디는 벨파스트를 떠나기 싫어한다. 영국 사람들이 자신의 아일랜드 억양을 알아듣지 못하면 어떡하냐고 걱정하자 버디의 할아버지가 말한다. “할아버지가 널 위하고, 엄마, 아빠도 널 위하고 할머니도, 형도 온 가족이 널 위하지. 네가 어딜 가든 무엇이 되든 그건 변함없는 사실이야. 그것만 알면 넌 안전하고 행복할 거다.”

어린 아이가 흔들리고 두려워할 때, 아이를 잡아줄 어른은 1차적으로 부모이다. 그런데 버디처럼, 부모의 (어쩔 수 없는) 결정이 아이의 고민거리가 될 수도 있다. 이럴 때 아이 마음에 생긴 그늘은 누가 봐 주나. 버디의 할아버지가 바로 이때 아이 마음을 가만히 쓰다듬어주는 ‘부모 아닌 어른’의 역할을 한다.

할아버지와 미주알고주알 일상을 나누는 버디.ⓒ유니버설픽쳐스
버디 가족은 가까이 사는 조부모와 자주 교류하며 지낸다.ⓒ유니버설픽쳐스

어쩌면 부모는 부모라서, 당장 가족의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해서, 주 양육자로서 책임이 막중해서 아이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아채지 못할 수 있다. 그러니 버디처럼 아이에게 자기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부모 아닌 어른이 있다는 건 얼마나 귀중한 일인가. 부모 말고도 기댈 곳이 있다는 것은 아이에게 든든한 자원이 될 것이다.

엄마 아빠가 뭘 원하는지는 신경 쓰지 말라며, 할아버지가 버디에게 묻는다. “네가 원하는 게 뭐니?” “할머니, 할아버지랑 같이 이사 가는 거요.” 버디의 대답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러나 버디 가족은 결국 쫓기듯 벨파스트를 떠난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벨파스트를 떠나고 싶다던 9살 아이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머니 집은 개신교도들의 직접적인 협박을 받지 않았고, 영화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노인들이 평생을 살아온 고향을 떠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손주 가족을 떠나보내는 주디 덴치의 표정 연기가 압권이었다. ⓒ유니버설픽쳐스
손주 가족을 떠나보내는 주디 덴치의 표정 연기가 압권이었다. ⓒ유니버설픽쳐스

버디 가족이 떠나는 날, 할머니가 이들을 멀찍이 떨어져 바라본다.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다시 볼지 기약이 없는 헤어짐이다. 할머니 역을 맡은 배우 주디 덴치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할머니가 혼자서 말한다. “가거라. 돌아보지 말고. 사랑한다.” 주름살이 온 얼굴을 뒤덮은 노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마지막 장면이 압도적이다. 이별이 불가피하다면, 잘 헤어지는 것도 노인이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구나.

할머니, 할아버지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버디. ⓒ유니버설픽쳐스
할머니, 할아버지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버디. ⓒ유니버설픽쳐스

나는 내 조부모님들께 어떤 사랑을 받았나.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가 첫 손주인 내가 외가댁에 가는 날이면 집 앞 골목까지 혼자 나오셔서 나를 목 빼고 기다리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린 마음에도 ‘아, 내가 할아버지한테 되게 중요한 사람인가 보다.’라고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멀리 사셔서 자주 만날 수 없었던 친할머니는 내가 방학 때 시골 친가에 가면, “잘 왔어, 잘 왔어.” 하며 두툼하고 거친 손으로 내 손을 하염없이 만져주시곤 했다.

어른이 되고서야 알았다. 할아버지의 기다림도, 할머니의 손길도 모두 사랑이었다는 것. 철이 없어서 받는지도 모르고 듬뿍 받은 사랑이었다. 내가 세상에 뿌리 내리는 데 그분들의 사랑이 분명히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시아버지의 돈 봉투. ⓒ최가을
시아버지의 돈 봉투. ⓒ최가을

남편은 유년 시절 자신의 아버지가 웃는 모습이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엄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시아버지는 쌍둥이에게 용돈을 주실 때, 늘 어디서 뽀로로 돈 봉투를 구해 오셔서 손수 하트를 그려 주신다. 아이들은 지금 자기들이 어떤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알까. 영화를 보니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희미하게나마 알겠다. 그건 아이가 속한 원 가족과 한 발짝 떨어져 ‘거리두기’한 사람이 줄 수 있는, 젊은 부모가 아니라 나이든 조부모라서 베풀 수 있는 사랑 아닐까.

*칼럼니스트 최가을은 구 난임인, 현 남매 쌍둥이를 둔 워킹맘이다. 아이들을 재우고 휴대전화로 영화를 본다. 난임 고군분투기 「결혼하면 애는 그냥 생기는 줄 알았는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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