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 일기 열 줄과 열다섯 줄
여름방학 일기 열 줄과 열다섯 줄
  • 칼럼니스트 최은경
  • 승인 2022.08.02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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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육아] 애랑 싸우다 찾아온 현타

남편의 휴가 마지막 날. 여행으로 미뤄 두었던 집안일을 할 때였다. 침대 위에서 세상 편한 자세로 휴대폰을 하고 있는 둘째 아이(12세)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이 좋게 보일 리 없던 나는 “너, 오늘 할 일은 했니?” 하고 물었다. “오늘 할 일? 없는데?” “없긴… 어젯밤에 안 쓴 일기 오늘 아침에 쓴다며.” 그제야 주섬주섬 일어나 일기장을 찾는 아이. 그런데 얼핏 보니 그 전에 써 둔 일기 분량이 턱없이 적은 게 아닌가. 갑자기 내 목소리가 높아졌다.

일기장 열 줄, 열다섯 줄. 이게 싸울 일인가... 싶었던 순간. ⓒ최은경
일기장 열 줄, 열다섯 줄. 이게 싸울 일인가... 싶었던 순간. ⓒ최은경

“너 일기 분량이 왜 이래?”

“왜 뭐가 어때서?”

“이게 무슨 15줄이야, 이렇게 쓰면 곤란하지.”

“내가 언제 15줄 쓴댔어. 열줄이야.”

“네가 이렇게 딴 소리 할 줄 알고 엄마가 냉장고에 붙여놨잖아. 봐봐. 여기 독서록은 15줄, 일기장도 15줄이잖아. 그리고 2021년 1월 9일 샘플이라고도 적어놨잖아.”

“그거 엄마가 잘 못 적은 거야. 난 그렇게 말한 적 없어.”

“무슨 소리야. 그래서 내가 이거 프린트 할 때 너한테 확인하라고 했잖아, 왜 그땐 말이 없다가 이제 와서 딴소리야.”

“아냐, 엄마가 잘 못 적은 거야. 열줄 맞아. 독서록이 열다섯 줄이고.”

“그건 네가 잘 못 생각한 거지. 엄마는 근거가 있고 너는 근거가 없잖아. 이게 우긴다고 될 일이니? 평소 너같이 똑부러지는 애가 10줄이 아닌 15줄로 내가 잘 못 적었으면 당장 와서 고쳐 달라고 말했을 텐데 왜 지금 와서 아니라고 하는 거냐고.”

대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솔로몬의 재판이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더 화가 난 이유가 있었다. 평소 아이는 자기가 한 말을 내가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따졌다. “엄마가 이랬잖아” 하고 말하는 것들이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그 후로도 나는 생각나지 않는데 아이는 내가 했다고 하는 말들이 생겼다. 이게 반복되니 아이 입장에서는 자신의 말에 내가 귀 기울여주지 않는다고 서운해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엄마는 내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아’ 이런 고정관념이 생기는 건 막고 싶었다. 나는 아이에게 양해를 구했다. 엄마가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잘 못하니, 할 말이 있으면 꼭 눈을 마주하고 대화하자고.

그후로 아이가 나에게 하는 말에 더 신경을 썼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아이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하면, 볼륨을 끄고 들으려고 했다. 설거지 중에 뭘 물어보면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말해달라고 했다. 아이의 말을 또 흘려듣게 될까 봐 그런 거였다. 그런 와중에 이런 일이 생긴 거다. 나는 혹시나 생길 이런 일을 대비해서 방학 계획표를 아이에게 보여주면서 내용을 확인하라고까지 했었다. 그때는 별 이야기가 없었기에 나는 당연히 합의된 내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이 말에 따르면, 그때는 일기 15줄이란 내용을 보지 못했고 나중에 잘 못 적혔다는 걸 알았지만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고 했다. 아이의 말이 이상하게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내가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이용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우기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아이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서로가 답답했지만 누구도 양보할 마음은 전혀 없어 보였다. 아이는 계속 “일기는 열줄이야”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때 현타가 왔다. 일기 열 줄과 열다섯 줄이 뭐라고 내가 열두살 아이와 이러고 싸우고 있는 건지 말이다. 체육관에서 단체로 워터파크에 간 날, 아이는 일기를 쓰다가 한 장도 부족하다면서 두 장을 넘게 썼다. 쓸 말이 많으면 시키지 않아도 열다섯 줄도 넘게 쓰는데, 일기 쓰는 것만으로도 칭찬할 일인데 이게 뭐라고 고작 일기 5줄에 내가 이러는지, 이게 그럴 일인지 갑자기 내가 한심해졌다. 좀 전까지 아이와 신나게 싸우던 내 안의 열두 살이 말했다. '좀 어른답게 굴어.'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그래 좋아, 그럼 너 말대로 일기는 열줄. 대신 오늘처럼 다음날 쓰는 건 없어. 일기는 그날 쓰기로 하자. 그리고 앞으로는 확인하라고 하는 정확히 확인해줘. 이런 일 없게.”

"알았어."

여름방학 일기는 아이가 하고 싶은 게 있어서 쓰게 된 거였다. 내가 시켜서가 아니라 본인 의지였다. 꼭 갖고 싶은 게 있다고 해서 ‘슬기로운 방학생활’을 위한 몇 가지 규칙에 일기를 넣은 것이다. 지난 겨울방학에도 아이는 일기를 매일 꾸준하게 잘 써서 원하는 보상을 받아낸 적 있다. 아이는 성취감과 보상에 꽤 만족해서 이번에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보상을 먼저 해주기로 해서 그런 걸까? 아이는 시키지 않아도 척척 일기를 썼던 그때와는 좀 달라진 듯 보였다.

이번 방학 아이의 소원은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 전집을 갖는 것이었다. 배송 오던 날 뛸 듯이 기뻐하던 아이. 과연 아이는 방학 때 주어진 미션을 잘 수행할 수 있을까. ⓒ최은경
이번 방학 아이의 소원은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 전집을 갖는 것이었다. 배송 오던 날 뛸 듯이 기뻐하던 아이. 과연 아이는 방학 때 주어진 미션을 잘 수행할 수 있을까. ⓒ최은경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일기는 열줄 써도 된다고 했다는 사실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나는 아이에게 솔직히 물어보기로 했다. “혹시 엄마가 잘 기억하지 못하는 거 이용해서 일기는 열줄이라고 우긴 거니?”라고. 거짓 없이 말해달라는 내 말에 아이는 아니라고 했고 나는 그 말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말했다.

“누구의 약점이든 그걸 이용하는 건 좋지 않은 행동이야. 잘 못하는 게 있으면 도와줘야지. 너도 잘 하지 못하는 게 있으면 엄마가 도와주고 그러잖아. 엄마도 잘 하지 못하는 게 있어. 그럴 때는 네가 좀 도와주면 좋겠어.”

매번 이야기를 할 때마다 녹음을 해 둘 수도 없고 또 이런 일이 생기지 말라는 보장이 없어 걱정이다. 집 나간 기억력이 좀 돌아와주면 좋겠는데, 그것이 내 맘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 신중하게 말하고, 확인하는 방법밖에 없겠다 싶다. 그리고 내 안의 열두 살을 살살 달래서 좀 더 어른다워져야겠다. 아직 개학까지는 20일이 더 남았고,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날 만큼 덥지만, 아무리 더워도 아이 앞에서는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 누구 하나 억울하고 속상하는 일 없도록.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기자로,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연재기사를 모아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성에 대해 아는 것부터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서 성교육 전문가에게 질문한 성교육 책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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