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피해자쉼터에서 처음 만난 자연이의 사연
가정폭력피해자쉼터에서 처음 만난 자연이의 사연
  • 기고=김지원
  • 승인 2022.08.22 08: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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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품다] 24. 김지원 초록우산어린이재단 강원동부아동보호전문기관 대리
가장 친근했지만 가장 멀어진 자연이 방의 모습. ⓒ초록우산어린이재단
가장 친근했지만 가장 멀어진 자연이 방의 모습.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코로나19 장기화로 어려움이 커지는 현재, 보호대상아동 및 보호종료아동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져야 할 것입니다. 베이비뉴스와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은 세상이 함께 키워가야 할 아이들을 따뜻하게 품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세상이 품다’ 연속 특별기고를 마련했습니다. 매주 월요일 아이들과 학부모, 전문가들과 함께 아동자립역량강화를 위한 글을 전해드립니다. - 편집자 말

가정폭력피해자쉼터에서 처음 만난 자연(가명, 19세)이는 한창 사춘기를 지나던 영동 지역 여중생이었다. 자연이의 아빠는 자연이가 더 어릴 때부터 술에 취하면 자연이가 보든 말든 자연이의 할머니를 무차별하게 때렸다. 이번엔 옆에서 말리던 자연이도 아빠에게 목이 졸렸고 자연이의 할머니는 늑골이 부러졌다. 할머니의 경찰 신고로 아빠는 급히 집을 떠났고 자연이와 할머니는 가정폭력피해자쉼터로 긴급하게 대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정폭력피해자쉼터는 장기 생활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자연이도 할머니도 아빠만의 왕궁이 된 듯한 집으로 돌아가기는 힘겨웠다. 다른 기댈 곳이 없던 자연이는 타 시군의 학대피해여아쉼터로, 할머니는 노인보호시설로 당분간의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그렇게 자연이는 원치 않게 전학 절차를 거치며 영동 지역에 한 곳뿐인 학대피해여아쉼터에서 1년간 생활하게 되었다. 

자연이의 아빠는 구속 요건이 충분했다. 그만큼 폭력의 정도가 심한 학대행위자였다. 자연이의 아빠가 구속되기 전까지 자연이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아동보호전문기관과 자연이의 판단이었다. 자연이는 꿋꿋하고 의젓하게 아빠의 구속을 기다렸다. 그렇게 자연이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친구들과 일상을 적응하던 중 식당을 전전하며 무전취식을 하던 아빠가 경찰에 구속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자연이의 아빠는 구속 중 긴긴 재판을 받고 1년 이상의 교도소 수감이 결정되었고, 이에 자연이는 1년 만에 학대피해여아쉼터를 퇴소하고 할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자연이는 지내던 곳으로 돌아오기 위해 또 전학 절차를 거쳤다.

안타깝게도 자연이와 할머니는 좀처럼 폭력의 기억을 극복하지 못했다. 아빠의 출소일이 다가오자 할머니의 공포심이 극대화되었고 도리어 할머니는 자연이의 양육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자연이는 모든 것을 이해하기엔 어린 나이였지만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말하곤 했다. 자연이에 대한 일반가정위탁보호까지 의뢰되었지만 중학생인 아이를 위탁보호하겠다고 나서는 위탁 부모는 없었다. 자연이가 생활했던 학대피해여아쉼터로 재입소하는 것마저도 더더욱 불가능했다. 자연이가 재차 학대피해를 받은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자연이는 학대피해아동이 아닌 요보호아동이 되어 집에서 첫 쉼터까지의 거리보다 더 먼 곳의 청소년쉼터로 다시 거처를 옮겨 고등학교 졸업까지 생활을 기약하게 된다. 집에서 쉼터로, 쉼터에서 집으로, 다시 집에서 다른 쉼터로 가기까지 그리고 3번째 전학을 하기까지 딱 두 해가 바뀌어 있었다. 자연이는 청소년쉼터에 오게 되는 아이들과 사연이 달랐지만, 행정적으로 요보호아동이었기 때문에 학대피해아동만큼 정부 지원이 불가능했다.

장기보호조치가 결정되면서 우리 기관과 자연이와의 만남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고, 그로부터 1년 뒤 자연이 아빠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출소 후 자연이와 할머니의 행방을 찾으며 술에 빠져 지내던 자연이 아빠가 음주 합병증으로 생을 달리한 것이었다. 여고생이 된 자연이에게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싶은지’ 물은 적이 있다. 자연이는 ‘당장 고민은 성적이 생각만큼 오르지 않아서 학원을 다니고 싶은데 그래도 쉼터에 있을 때 학원비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더 이상의 전학은 싫다’고 답했다. 자연이는 본인이 감당하기 힘든 그 많은 상처는 숨기고 밝은 장래와 정착을 희망하고 있었다.

재기발랄했던 사춘기의 여중생은 학교와 집을 오가는 생활이 전부였다. 그러던 중 원치 않게 집과 학교, 동네를 여러 차례 떠나고 터전인 영동 지역과 그 너머를 떠돌게 되었다. 가족의 한계, 지역의 한계, 시설의 한계로 아이가 기댈 곳은 아주 제한적이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이 반복될수록 의젓하게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지내던 지역에 촘촘하게 쉼터가 설치되었더라면, 할머니가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학대 피해로 인한 가족의 사후적인 어려움을 보다 공식적이고 체계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었더라면, 그렇게 소외됨 없이 사회가 이 아이를 더 돌아봤다면 이제 막 고등학생인 자연이가 다른 친구들보다 빨리 홀로서기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을까. 처음부터 폭력이 없었다면 자연이의 삶이 달랐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폭력이 없는 세상, 아이들이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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