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대 때 MBTI 검사를 하면 마지막 항목인 J(판단)과 P(인식)에서 P 지수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P는 자유롭고 융통성이 있다는데, 솔직히 그 시절의 나는 자유롭다 못해 대책이 없었고, 융통성이 차고 넘치다 못해 계획이란 걸 세우지 않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J가 높게 나온다. 나 자신도 느낀다. 아이를 낳고 나는 24시간을 촘촘한 시간표에 따라 구획하여 쓴다.
그렇지 않으면 쌍둥이 등원, 출근, 업무, 퇴근, 하원 후 육아라는 임무를 수행해낼 수가 없다. ‘15분만 더 있으면 저 설거지를 해 놓고 출근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고, 30분만 더 하면 일을 다 끝내고 퇴근할 수 있을 상황에도 아이들 하원 시간을 맞추기 위해 칼같이 끊는다. 마치지 못한 30분만큼의 업무는 아이들이 자고 난 후 재택으로 미루면서. 15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서 쓰다니, 즉흥성이라는 게 끼어들 수 없는 생활이다.
프랑스 영화 '풀타임'(2021)의 쥘리도 나처럼 직장에 다니는 양육자다. 쥘리에게 일상에 즉흥성이 없다는 내 불평은 사치다. 첫째, 쥘리는 싱글 맘이다. 호텔 메이드로 일하며 혼자 돈도 벌고 아이 둘도 봐야 한다. 남편은 이번 달 양육비를 이체하지 않았는데, 며칠째 연락이 안 된다. 은행에서는 대출 연체 때문에 전화가 걸려오고, 설상가상으로 직장에서는 해고 위기에 몰린다.
둘째, 직장과 집 사이의 거리가 멀다. 멀어도 너무 멀다. 직장은 파리 한복판에 있는데, 집은 파리 교외다. 파리로 이사 가면 세 식구가 닭장같이 좁은 집에서 살아야 하고, 지금 사는 동네에는 좋은 일자리가 없다. 쥘리는 어두컴컴한 새벽에 애들을 깨워서 동네 이웃집에 애를 맡기고 파리 광역 급행 열차를 잡으려고 마구 뛴다
셋째, 위급 상황에 달려와 줄 조력자가 단 한 명도 없다. 사실 아이가 아프거나 부모가 둘 다 야근해야 할 때 필요한 것은 어른 딱 한 명이다. 그 어른 딱 한 명만 있으면 되는데 쥘리에게는 그 사람이 없다. 이웃집 할머니는 애 보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겠다는데, 새로운 시터를 구할 때까지 며칠만이라도 와줄 사람이 없다.
한 마디로 쥘리 가족의 일상은 쥘리가 없으면 굴러가지 않는, 쥘리가 없으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위태위태한 기반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 가족의 일상에 재난 같은 일이 터진다. 바로 전국 대중교통 파업이 일어난 것이다.
파리로 가는 모든 대중교통 수단이 막혀 버린다. 도로에서 이웃의 자동차를 운 좋게 잡아타도 파리 진입로가 꽉 막힌다. 호텔에서는 언제 출근하냐고 전화가 온다. 겨우 출근해서 일을 마치고 집에 가야 하는데, 이젠 집으로 가야 하는 열차도 버스도 끊겼다. 자동차도 잡히지 않는다. 이웃집 시터는 언제 애들을 데리고 갈 거냐고 화를 낸다. 보는 나까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육아는 돈과 시간과의 싸움이다.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교육 시킬 돈이 있어야 하고, 쥘리나 나처럼 아직 아이들이 집에 혼자 있지 못할 나이면 아이의 24시간을 채워줄 보육 기관, 학교, 돌봄 인력이 필요하다. 아이가 청소년이 된다고 시간에서 자유로워지지는 않는다. 아이와 이야기하고, 일상을 함께 하는 시간이 필요하긴 마찬가지다.
영화 '풀타임'은 돈도 끊기고, 시간도 동나버린 여성 양육자의 일상을 실감나게 그린다. 영화 홍보 문구로 쓰인 ‘일상 스릴러’라는 문구가 과장이 아니다.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심장 박동을 빠르게 하는 배경 음악과 함께 숨 가쁘게 전개된다. 쥘리는 잠 잘 때 빼고는 쉬지를 못한다. 영화 제목이 ‘풀타임’인 이유다.
임금 노동과 육아 및 가사 노동을 홀로 떠맡은 여성의 삶이 어떤지 그 속살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다. 돈과 시간과의 싸움을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나 같은 관객도 재밌게 봤지만, 양육자가 아닌 사람, 남성 양육자 등 다양한 상황에 처한 관객들도 흥미롭게 볼 수 있을 듯하다. 88분의 러닝 타임 동안 군더더기 없이 영화가 전개되어 사정없이 심장이 조일 테니 마음의 각오는 필수!
*칼럼니스트 최가을은 구 난임인, 현 남매 쌍둥이를 둔 워킹맘이다. 아이들을 재우고 휴대전화로 영화를 본다. 난임 고군분투기 「결혼하면 애는 그냥 생기는 줄 알았는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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