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 연애 없이 모험만 해도 돼
딸아, 연애 없이 모험만 해도 돼
  • 칼럼니스트 최가을
  • 승인 2022.10.04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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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엄마의 방구석 심야 영화관] 모아나(2016)

내 인생의 첫 OST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였다. 당시 아홉 살이었던 내 인생의 첫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는 내게 신세계를 열어줬다. 영화라는 게 이렇게 재미있고, 노래라는 게 이렇게 아름다운 거구나! 엄마를 따라 동네 음반 가게에서 인어공주 테이프를 사서 늘어질 때까지 듣고, 또 들었다. 이후로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언 킹'까지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나의 유년 시절에 영화와 음악을 감상하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사라졌다.

6년 전에 나온 '모아나'를 이제서야 봤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6년 전에 나온 '모아나'를 이제서야 봤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그러다가 ‘모아나’를 뒤늦게 봤다. 여주인공 모아나는 모투누이 섬 족장의 딸로, 미래에 족장이 될 예정이다. 그런데 섬에 저주가 걸려서 물고기도 잡히지 않고 코코넛 나무도 타들어가면서 부족의 생계가 위험해진다. 늘 암초 너머 바다가 궁금했던 모아나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섬의 저주를 풀기 위해 혼자 항해를 떠난다. 그 과정에서 신화 속 남자 영웅 마우이를 만난다.

'뭐야, 모아나랑 마우이랑 사랑하는 거야?' 섣불리 짐작한 중년 관객, 바로 나!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뭐야, 모아나랑 마우이랑 사랑하는 거야?' 섣불리 짐작한 중년 관객, 바로 나!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음, 여기서 이미 구세대가 되어버린 엄마 관객인 나는 ‘저러다 마우이랑 모아나가 사랑에 빠지나 보네, 너무 뻔한 것 아니야?’ 라고 지레 짐작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아무리 봐도 마우이가 전통적인 왕자 캐릭터와 너무 달랐다. 마우이는 모아나보다 덩치는 훨씬 크지만 용기는 부족한 인물로 그려진다. 마우이는 상황이 어려워 보이면 포기하려고 하는데, 그때마다 모아나가 어딜 도망 가냐며 마우이의 멱살을 잡아서 끌고 가는 식이다. 심지어 이들의 모험이 실패로 돌아갈 것 같은 최후의 순간에 마우이는 사라진다.

마우이가 다시 돌아와 이들의 모험은 성공으로 끝나지만, 나는 끝까지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쟤네 둘이 진짜 안 이어지는 거야?’ 그랬다. 모아나와 마우이는 끝까지 우정‘만’을 나누는 파트너였다. 연애 감정이 불러일으키는 긴장이 끝까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모험이 끝나자 또 보자고 헤어지는 것이 이들의 세상 쿨한 해피엔딩이었다.

모험 끝! 잘 가라! 쿨하게 헤어지는 그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모험 끝! 잘 가라! 쿨하게 헤어지는 그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내 어린 시절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속에서 모험을 떠나는 주인공은 남자거나(‘라이언 킹’, ‘알라딘’) 여자 주인공이 먼 길을 떠난다면 그 목적은 사랑을 이루기 위해 서였다(‘인어공주’). 또한 결말은 늘 남녀 주인공이 행복한 커플이 되는 것이 해피엔딩으로 제시됐다(‘미녀와 야수’).

공주를 배신하는 못된 왕자가 나오고 왕자 아닌 평민 남자가 공주를 돕는 ‘겨울 왕국’(2013)도 기존의 디즈니 공주 이야기를 비틀긴 했으나 남녀 간의 로맨스가 아예 배제되진 않았었다. 그런데 내가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챙겨보지 않은 사이, 세상은 조금이나마 변하고 디즈니도 그 변화에 발 맞춰서 이런 애니메이션을 내놓은 것이다. (심지어 ‘모아나’의 공동 감독 론 클레멘츠와 존 머스커는 ‘알라딘’과 ‘인어공주’ 감독이었다.)

할머니는 늘 암초 너머 바다를 궁금해하는 모아나를 격려해준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할머니는 늘 암초 너머 바다를 궁금해하는 모아나를 격려해준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모아나’가 2016년 작품인 걸 감안하면 ‘세상이 이렇게 변해 있었구나!’라며 놀라는 내가 엄청나게 뒷북을 치고 있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내 딸이 접할 애니메이션은 내가 접했던 작품보다 진일보했다고 생각하니 기쁘고, 기뻤다. 내 딸은 남성 캐릭터가 나오면 자동적으로 연애 대상으로 간주하는 이 고리타분한 엄마를 넘어서기를 바란다.

세상이 변하고 디즈니가 변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이성애 로맨스를 해피엔딩으로 보여주는 콘텐츠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더 많은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러니 내 쌍둥이 남매들과 함께 볼 영화로 ‘모아나’와 같은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남성 캐릭터가 여성이 주도하는 모험의 동료로만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가 연애 없이 오직 모험만으로 자신의 여정을 가득 채운 영화도 가능함을 보여줄 수 있으니 말이다.

*칼럼니스트 최가을은 구 난임인, 현 남매 쌍둥이를 둔 워킹맘이다. 아이들을 재우고 휴대전화로 영화를 본다. 난임 고군분투기 「결혼하면 애는 그냥 생기는 줄 알았는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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