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라서 보기 힘들었지만, 부모라서 더 봐야 하는 영화
부모라서 보기 힘들었지만, 부모라서 더 봐야 하는 영화
  • 칼럼니스트 최가을
  • 승인 2023.03.06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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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엄마의 방구석 심야 영화관] '다음 소희'(2022)

영화 '다음 소희'의 주인공 소희는 춤 추는 걸 좋아하고, 부당한 일을 보면 참지 않고 큰 소리를 내는 씩씩한 18살 청소년이다. 그는 특성화고 애완동물과 학생이지만, 전공과 관련 없는 콜센터, 그 중에서도 해지를 원하는 고객을 회유하는 부서에 현장실습을 나간다. 욕설과 성희롱 발언을 들으면서 감내해야 하는 감정 노동의 강도가 높아서 1년 간 입사자보다 퇴사자가 더 많은 악명 높은 부서였다. 영화는 2017년 전주의 한 특성화고 학생 홍수연님이 엘지 유플러스 콜센터 현장실습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영화의 전반부는 소희가, 후반부는 형사 유진이 이끌어간다.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영화의 전반부는 소희가, 후반부는 형사 유진이 이끌어간다. ⓒ트윈플러스파트너스㈜

구인난을 겪는 회사에게 특성화고 현장실습생들은 싸게 부려먹을 수 있는 반가운 인력이었다. 회사는 현장실습생들에게 실적 압박을 가하면서 실습생이라는 이유로 실적이 높아도 인센티브 지급을 미룬다. 소희는 원래 성격대로 왜 인센티브 지급을 미루냐고 팀장에게 항의하고, 현장실습생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폭로하며 자살한 상사의 장례식에 홀로 찾아간다.

항의하다가 팀장에게 멱살 잡히는 소희. ⓒ트윈플러스파트너스㈜
항의하다가 팀장에게 멱살 잡히는 소희. ⓒ트윈플러스파트너스㈜

그러나 학교는, 회사는, 이 사회는 화면을 뚫고 나올 것처럼 펄펄 끓던 소희의 생기를 지켜주지 못한다. 팀장은 실습생이니까 인센티브 지급 연기는 당연한 거 아니냐고 하고, 회사는 자살한 직원에 대해 함구하라며 직원들에게 돈을 건넨다. 그만두고 싶다고, 내가 콜센터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아냐고 호소하는 소희에게 담임 교사는 어떻게 뚫은 대기업인데 니가 그만두면 후배들도 못 들어가니까 잘 버티라고 대답한다.

소희는 시들어간다. 안색이 창백해지고, 입술이 건조해지고, 목소리가 작아진다. 안 되는 동작을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 연습실에서 땀을 뚝뚝 흘리면서 춤을 추던 소희는 예전 동료들이 춤추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다가 슬쩍 연습실을 뜬다. 친구와 눈이 오는 밤거리에 주저앉아 있다가 자해를 한다. 슬리퍼만 신고 도로를 터덜터덜 걷다가 저수지에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존재 자체만으로 엄청난 생명력을 뿜던 청소년 한 명이 어떻게 죽음으로 걸어들어가는지가 배우 김시은의 몸짓과 표정을 통해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된다.

자기가 무슨 신발을 신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추운 날씨에 슬리퍼를 신고 걷는 소희.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자기가 무슨 신발을 신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추운 날씨에 슬리퍼를 신고 걷는 소희.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소희의 죽음은 누구의 책임인가. 이 청소년의 죽음에 한국 사회의 온갖 병폐가 다 얽혀 있다. 최소한의 안전망 없이 사람을 부품처럼 쓰고 버리는 회사. 현장 실습 현장이 어떤지 철저히 조사하지 않고 청소년들을 보내는 학교. 산업재해에 관대한 법 제도. 기술직을 천대하는 문화.

콜센터 벽에는 직원별 실적과 해지방어율을 수치화한 등수 표가 붙어 있다. 소희의 죽음을 수사하다가 열통이 터진 나머지 교육청에 찾아간 형사 유진(배두나)가 교육청에서 맞닥뜨리는 것도 벽 하나를 가득 채운 특성화고별 취업률이다. 노동이 오로지 실적이라는 숫자로 집계될 때, 교육도 그 길을 똑같이 따라간다. 교육청 담당자가 유진에게 말한다. 취업률 따라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데 어떡하냐고.

왜 학생이 일하다 죽었는데 아무도 자기 책임이라고 말하는 어른이 없냐고 교육청에 찾아가는 형사 유진.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왜 학생이 일하다 죽었는데 아무도 자기 책임이라고 말하는 어른이 없냐고 교육청에 찾아가는 형사 유진.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시스템이 돈과 숫자에만 골몰하는 사이, 가장 약한 청소년들이 으스러진다. 영화의 제목은 ‘다음 소희’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었다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홍수연 학생 이후로 2017년 제주도 생수 제조 라인에서 기계에 몸이 눌려 이민호 학생이, 2021년에는 전남 요트 업체에서 잠수 작업 중 홍정운 학생이 숨졌다.

부끄럽지만 특성화고 현장실습에 이런 문제가 있는지 모르고 살았다.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더더욱 사회에 무관심해지면 안 된다고 머리로는 알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더 절절히 깨닫게 됐다. 내 아이가 성인이 되어 일하게 될 사회의 현실이 이렇다. 우리는 가장 안전하게 보호해야 할 청소년 노동자들을 가장 위험한 현장으로 내몰고 있다. 꼭 부모가 아니라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도 알아야 하지만, 부모라면 더더욱 괴롭지만 알아야 하는 현실이다. 그와 더불어, 현실은 너무 잔인하니 속속들이 알고 싶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외면한 나 같은 어른들의 무관심도 이 거대한 시스템의 공모를 무럭무럭 키우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알려준 영화이기도 했다.

우리 사회는 가장 안전하게 보호해야 할 청소년 노동자들을 가장 위험한 현장으로 내몰고 있다.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우리 사회는 가장 안전하게 보호해야 할 청소년 노동자들을 가장 위험한 현장으로 내몰고 있다.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칼럼니스트 최가을은 구 난임인, 현 남매 쌍둥이를 둔 워킹맘이다. 아이들을 재우고 휴대전화로 영화를 본다. 난임 고군분투기 「결혼하면 애는 그냥 생기는 줄 알았는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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