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속 20년, 나홀로 4박 5일 여행
근속 20년, 나홀로 4박 5일 여행
  • 칼럼니스트 최은경
  • 승인 2023.05.22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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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한번 해봤어] 나만의 자축 세리머니

이날이 올 줄 몰랐다. 2003년 입사해서 줄곧 한 회사에서 20년을 일하는 날이. 입사 10년은 제2의 사춘기였다. 내가 이 일을 잘하고 있는 건가? 아직 좋아하나? 계속 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 해야 할까? 나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차고 넘쳤다. 

그후로 10년이 더 지난 20년을 맞은 마음은 일 하는 나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나 자신에 대해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고생했다, 대견하다, 멋지다, 잘 살았다." 누구도 해주지 않는 말을 나 자신에게 철철 넘치도록 해주고 싶었다. 

20년 전 첫 출근한 날 5월 12일을 전후로 매일매일 나를 칭찬했다. 후회나 부정적인 단어는 (없는 것은 아니지만) 1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보다 뿌듯하고 감격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지금은 별 의미도 없는 상이지만 초등학교 6년 개근을 했을 때의 뿌뜻한 마음 같았달까. 열심히 살아준 나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가만 있자, 말로만 축하할 것이 아니라 나에게 상을 주자. 그래서 떠났다. 4박 5일 나홀로 여행. 충분히 그럴 자격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혼자 하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동행인도 섭외했다. 콘셉트는 분명했다. "근속 20주년 축하 여행" 그들이 내 마음 같을 리 없겠지만 적어도 이런 나를 이해는 해줄 것 같았다. 오래 보고 지낸 사람들이니 내가 대놓고 좋아한다고 해도 부끄러울 게 없는 사람들이었다. 

남편에게도 양해를 구했다. 남편 역시 한 직장에서 20년 근속인데 혼자 떠나는 것이 미안해서 말했다.  

"바쁜 일 끝나면 다음엔 자기가 다녀와."

"요즘 회사 분위기 같아서는 그럴 시간이나 있을까 싶다, 잘 다녀와."

두 아이들에게도 말했다. 

"엄마, 근속 20주년 여행 다녀올 거야.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그런 말 알지? 엄마 20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가는 거야. 부러우면 너희들도 열심히 살아. ㅋㅋ 엄마 없는 동안 아빠 말씀 잘 듣고 해야 할 일 잘 하고 있어. 알았지?"

어쨋거나 혼자 놀러가는 것이니 민망한 마음에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끌어다 하는데 어느덧 초등학교 6학년, 고1이 된 아이들은 이렇다할 반응이 없다. 잔소리 하는 사람이 없어져 오히려 좋아하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진주성 안에서. ⓒ최은경
진주성 안에서. ⓒ최은경

4박 5일은 정말 짧은 기간이었다. 시계를 볼 일도 없어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만큼 잘 놀았다. 혹시나 해서 챙겨간 노트북은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다. 경상남도 진주에서 2박. 진주성에서 아침 산책을 하고 진주 시장에서 복국을 먹었다. 가족이 함께 오는 여행이었다면 어땠을까. 아침 산책 대신 애들 아침을 차리고 있었겠지. 

진주 외곽에 있는 경상남도 수목원과 월아산 숲속의 진주에 가서 푸른 자연을 질리도록 마음껏 즐겼다. 가족이랑 왔으면 어땠을까. 걷기 싫어하고 벌레 싫어하는 녀석들이 더 이상 걷기 싫다고 버티지 않았을까? 목 마르다고, 덥다고, 배고프다고 짜증을 내지 않았을까? 진심 아무 방해없는 시간이 행복했다(미안하다 애들아).  

대구에서의 2박. 도착한 날부터 대구의 이른 더위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서울에서 온 친구와 조인해서 호캉스를 즐겼다. 대구시립미술관에서 가서 작품들을 감상했고 수성못에서 야경을 즐겼다. 호텔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했다. 못하는 수영이지만 그래도 몇 바퀴 돌았고 물에 그저 둥둥 뜨고 마는 배영도 했다. 시원하고 자유로웠다. 밤에는 못다한 폭풍수다. 다음날 아침엔 오랜만에 호텔 조식을 즐겼고 독립서점에서 책도 고르고 여행을 함께 해준 감사한 사람들에게 엽서도 썼다. 

대구 수성못의 야경. ⓒ최은경
대구 수성못의 야경. ⓒ최은경

친구가 서울로 간 저녁에는 대구에 사는 지인과 함께 대구독립영화관에서 오랜만에 영화도 한편 감상했다. 20년 전, 전주국제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 부천국제영화제를 쫓아다니면서 영화를 볼 때도 있었는데... 그 시절이 떠올라 한참 아련했고. 그때 지인이 물었다. 

"엄마 혼자 4박 5일이라니... 죄책감 안 들어요?"

"응? 죄책감? 나 혼자 와서? 아니 전혀 안 드는데요. 나는 애들한테도 말하고 왔어요. 엄마 근속 20주년 여행이라고. 열심히 일해서 놀다 오는 거라고."

"아, 난 아직 그게 안 되더라고요. 괜히 미안하고 또 걱정도 되고..."

그래, 나도 안다. 그게 되는 엄마가 있고 안 되는 엄마가 있다는 거. 내가 이렇게 생활할 수 있는 건 나를 이해해주는 한 사람 때문이라는 걸. 둘째 말에 따르면 가사 분담 비율 8:2에서 8을 맡고 있는 남편(전적으로 아이 기준, 내 입장에서는 좀 억울한 수치다). 내가 20년 근속 하는 동안 가장 고마운 사람. 

'직장맘'이라는 타이틀로 18년을 살면서 일하고 살림하고 육아하고 글쓰며 살고 있는 것은 남편의 역할이 컸지만, 이 글을 그렇게 마무리 하긴 어쩐지 싫다. 그 공이 전부 남편에게 돌아가는 것 같아서(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어쨋거나 내 몸 아파도, 관계에 상처 받아도, 일이 고되도, 결국은 견디며 하루하루 20년을 버텨온 것은 나니까.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거 아니니까 20년을 기념하는 하루 만큼은 좀 이기적이도 괜찮지 않을까? 다 내가 잘해서라고. 하하하.

언젠가 우연히 보게 된 자동차 광고가 참 인상적이었다. 어느덧 50년을 연기해 온 68세 배우 김혜숙에게 질문했다. "50년 동안 연기하시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게 있다면요?" 배우는 답한다. "그 50년에 기대지 않는 것이요" 이 말이 너무 멋있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나 역시 일해 온 20년에 기대지 않겠노라고. 오늘 하루를 잘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여행은 금세 끝났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지만 생각한 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테니, 더 나은 나를 꿈꾸며 오늘도 아자아자, 파이팅이다.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기자로,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연재기사를 모아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성에 대해 아는 것부터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서 성교육 전문가에게 질문한 성교육 책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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