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광화문이고요, 회식 반장입니다
회사는 광화문이고요, 회식 반장입니다
  • 칼럼니스트 최은경
  • 승인 2023.05.30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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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한번 해봤어] 20년 차 직장인의 기쁨

"야, 여기 맛있다. 어떻게 알았어?"

"그치! 맛있지. 나 우리 회사 회식 반장이잖아."

"야, 네 연차가 몇 년인데... 지금 회식 반장을 해?"

"연차 많으면 회식 반장 하란 법 없냐? 난 오히려 좋은데!"

친구랑 나눈 이야기 한 토막이다. 코로나 3년을 거치는 동안 딱히 회식이랄 게 없었다. 재택이 기본 근무였던 탓도 있지만 회사를 가는 날이라 하더라도 저녁은 곧 ‘술 먹는 모임’이라 참여하기 부담스러운 것도 있었다. 본부장이 바뀌고 부서장 회의가 한 달에 한번 정례화되면서 그리고 코로나 감염자가 점점 줄면서 회의 후 간단히 저녁을 먹고 가는 분위기가 생겼다.

저녁을 한두 명이 먹을 때와 네 명 이상이 먹을 때는 장소 선택이 중요하다(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보통 아래 후배들이 장소 선정과 예약을 맡는 경우가 대부분일 터. 친구도 아마 이런 일반적인 회사 분위기를 잘 알기 때문에 내가 회식 반장이라는 걸 의아하게 생각했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래서 써봤다. 20년차 직장인인 내가 회식 반장이 된 썰.

◇ 맛에 진심인 나

어느 날 회의가 끝나고 저녁을 먹고 가려고 하는데 미처 식당 예약을 못했다. 일이 일찍 끝난 내가 먼저 가려던 고깃집에 가봤던데 이미 만석이었다. 소문난 맛집에서 회식하기란 어찌나 어려운지. 대안을 찾아야 한다. 길바닥에서 블로그를 뒤져 회식할 만한 곳을 찾았다.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밀려오는 동시에 그 불안감을 떨쳐버릴 장점이 있는 곳. 그래, 여기다.

지리적으로 사무실과 가까운 위치에 있어 10명 남짓한 직원들이 찾아오기 쉽고 참가 연령대(주로 40~50대)가 무난하게 식사를 할 수 있는 집(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예산도 고려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위생적으로 깔끔해 보이는 집. 아무리 맛있어도 지저분한 집은 일단 거르고 보는 것은 나의 일관적인 맛집 선정 기준. 그렇게 선정된 게 국밥집. 일단 가보자. 앗, 그런데 이런... 손님이... 없다.

코로나인 것을 감안하고 저녁 시간대라는 것을 생각해도 아무도 없는 식당에는 어쩐지 발길이 선뜻 가지 않는데... 그래도 가봐야지. 먹어봐야 또 올 수 있는 곳인지 아닌지 알 수 있으니까. 저녁에는 사장님이 혼자 하시는 듯했다. 10명 테이블 자리를 만들어 두니 하나둘 씩 일을 마친 동료들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식사와 안주가 테이블에 부지런히 올려지는 동시에 올라가기 시작하는 내 입꼬리. 걱정과 달리 동료들의 반응이 좋다. 그것도 아주.

광화문 근처 국밥집. 안주가 일품이다. ⓒ최은경
광화문 근처 국밥집. 안주가 일품이다. ⓒ최은경
광화문 근처 국밥집. 가성비 갑의 안주들. ⓒ최은경
광화문 근처 국밥집. 가성비 갑의 안주들. ⓒ최은경

내 집에서, 내가 마련한 음식들도 아닌데 맛있다며 음식을 싹싹 비울 때의 감동. '누가 이 집을 골랐냐'는 말까지 들리기 시작할 때는 음식을 만든 사람은 아니지만 기분이 째진다. 밥도 술도 술술 들어간다. 배 부르고 등 따시니 그동안 못 다했던, 회의 자리에서는 딱히 나오지 않을 법한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들이 술술 풀어진다. 많이 웃고 많이 이야기한다. 재택근무로 좀처럼 얼굴 근육 풀 일이 없는데 이 시간만큼은 근육들이 제 맘대로 씰룩씰룩 거린다. 게다가 이 가격에? 그날 회식 자리를 파하며 본부장이 내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네가 회식 반장해라.”

잉? 내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내가 적임자였다. 미취학 아이를 둔 직장맘은 현실적으로 저녁 회식에 자주 참여할 수 없으니 회식에 관심이 있을 리 없고 다른 후배는 오래 지켜본 결과 맛에 진심인 편은 아니었다. 또 다른 후배는 외근이 많고 일하는 곳이 주로 여의도라 이곳 식당에 밝지 못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나는 같은 값을 주고 먹을 바엔 맛있는 걸 먹자는 주의자. 2003년부터 광화문과 상암동을 거쳐 다시 광화문을 거점으로 직장 생활을 한 지 20년.  그동안 한 번 가봐서 좋은 데는 네이버에 '즐겨 찾는 장소'로 저장해 두고, 가보지는 않았지만 지나가다 내 눈길을 끌었거나 좋은 평가를 들은 식당들도 일단 '즐겨 찾는 장소'로 따로 저장을 해두는 타입.

그러다 혼자 점심을 먹게 되는 날이거나 미팅이 있을 때 도장 깨기 하듯 저장된 집으로 가서 직접 검증을 해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다음에 또 올 곳'과 '한 번으로 족한 곳'과 '자주 올 곳'을 나름대로 분류했다가 기회가 있을 때 적절히 꺼내 쓰는 맛에 진심인 K-직장인, 그게 바로 나다. 장소 선정이 끝이 아니다. 식사 후엔 사람들 반응까지 살핀다. “여기 음식은 어때요? 괜찮아요?” 식당 주인도 아닌데 왜 이러는 건지 원.

◇ 좋아하는 일로 즐거움 주기

사람마다 입맛이 다른데 장소를 결정하기가 힘들 때도 있지 않냐고? 물론 있다. 그럴 때는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기도 하면서 부담을 덜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고민하는 걸 즐기는 편이다. 사실 나는 건강상의 이유로 양보다는 질을 선호하는 편이라 식당을 고를 때 맛을 조금 더 중요하게 따진다. 어차피 많이 먹지 못하니 한 입을 먹어도 맛있는 걸 먹자는 마음이랄까. 그런 내가 선택한 맛있는 식당에서 내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좋은 대화를 나누었을 때, '사는 게 뭐 별 건가 이 맛에 사는 거지'라는 표정으로 시끌벅적한 현장을 목격했을 때... 일과는 다른 면으로 뿌듯하다. 내가 좋아하고 잘 하는 일로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게 좋다. 그 분위기를 사랑한다. 좋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장소 선택에 늘 신중한 이유다. 그냥 사랑하게 되기는 싫으니까.

그렇게 약 1년이 안 되는 동안 회식 반장을 하며 느끼게 된 게 있다. 회식 반장에게 필요한 자질이 있다면 그건 맛집 예약에 자주 성공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들이 모두 즐겁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것. 그러려면 우선 담당자부터 회식 시간이 즐거워야 할 것 같다. 다행히도 아직은 내가 그렇다. 지난번 회식 장소도 처음 간 곳이었는데... 성공적이었다. 이 정도면 광화문에 내 이름을 따서 '맛집 코스'를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칭찬도 받았다. 좋아서 하는 일인데 내 선택을 믿어주는 동료들까지 있으니 더 잘 하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쓰다보니 회식 이야기만도 아닌 것 같다. 일도 그렇지 않나. 회식도 일의 연장선이니 당연한 말인 건가. 

다음 달 회식 장소도 이미 찜해뒀다. 지난번 고기 한 마리 코스 회식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불참한 후배를 위한 해산물 코스 요리다. 벌써부터 회식 자리가 기대되는 게 나뿐만은 아니겠지?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기자로,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연재기사를 모아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성에 대해 아는 것부터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서 성교육 전문가에게 질문한 성교육 책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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