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은 내가 미국에 있을 때 겪었던 일이다. 꽤 오래전 일인데도 어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다. 이 일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을 만큼 아찔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최고의 경험을 선사해 준 사건이기도 하다.
◇ 난처한 상황에 도움 청하자 돌아온 말 "네 남편은 어디에 있는데?"
그날 나는 아이와 함께 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장 본 물건을 차에 실으려고 하는데 차 문이 저절로 잠겨 버렸다. 핸드폰과 차키는 차 안에 둔 채였다.
처음엔 너무 황당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곳이 한국이었다면 공중전화나, 아니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핸드폰을 빌려 보험사든 지인에게든 전화를 걸어 어떻게든 차 문을 열 방법을 찾았겠지만, 여기는 미국이었다. 나는 영어가 유창하지 않았고, 연락할 사람도, 방법도 없었다. 그저 막막했다.
놀란 마음을 진정하고 마트 고객센터로 가서 나의 상황을 설명했다.
”차키와 핸드폰이 모두 차에 있는데 차 문이 잠겨 버렸어. 도움을 받고 싶은데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내 상황을 들은 직원은 이렇게 되물었다.
”Where is your husband?(네 남편은 어디에 있는데?)“
영어에 능통하지 않은 나도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들은 남편에게 전화해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했다.
나는 당당히 이렇게 말했다.
”I don't have a husband(나는 남편이 없어).“
직원의 눈빛이 약간 흔들린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직원은 이내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다시 그럼 너의 친구나, 가족은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나는 ”가족은 한국에 있고, 미국 친구들의 번호를 외우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핸드폰이 차 안에 있기 때문에 친구들의 번호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제야 내 상황을 이해한 직원은 자신의 전화로 차 문을 열어주는 회사(POP-A-Lock)를 수소문했고, 그 회사의 직원이 나를 만나러 마트에 올 수 있도록 도와줬다. 직원의 친절함에 놀란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는 듯싶었다.
하지만 15분만 기다리면 된다고 했는데, 조금만 기다리면 곧 온다는 말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들은 오지 않았다. 15분이면 된다더니, 이제는 30분이면 도착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저녁 7시부터 밤 12시까지 나와 사랑이는 무려 5시간이나 차 문 열어주는 사람을 기다렸다.
차 문 열어주는 회사의 직원들은 나를 만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단지 자꾸 길이 엇갈렸을 뿐이다. 내가 마트 안에서 기다리다가 밖으로 나가 기다렸다가, 다시 마트로 돌아와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 전화를 하러 간 순간 직원들이 왔다가 내가 보이지 않자 그냥 돌아가는 일이 생겼다.
밤 10시가 넘어가자 사랑이는 배가 고프다고 했다. 카드도 차 안에 둔 상황이라 내가 사랑이에게 먹일 수 있는 것은 물뿐이었다. 너무 속상하고 답답해서 눈물도 안 나오는 어이없는 상황… 한국이었다면 전화 한 통에 모든 문제가 30분 안에 해결됐을 텐데… 낯선 미국 땅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춥다고 오들오들 떠는 사랑이의 손을 내 옷 사이에 넣어주는 일뿐이었다.
그 와중에 마트 고객센터 직원이 내게 던진 ”Where is your husband?“ 가 귓가에 맴돌았다.
남편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스스로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에 차마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나를 덮쳤다.
◇ 자책감에 혼자 허우적대던 엄마 옆을 묵묵히 지켜준 내 딸 사랑이
그러나, 밤 11시가 넘어가자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마트 주차장에서 노숙할 순 없다. 혼자였다면 어떻게든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렸겠지만 지금 내 옆에는 배고픔과 추위에 떠는 아이가 있다.
다행히 조금 멀지만 걸어갈 만한 곳에 한인 식당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도움을 구했다. 사정을 들은 그들은 우리를 도와주려고 다양한 방법을 강구했다. 그 따뜻한 마음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드디어 밤 12시. 드디어 POP-A-Lock 직원을 만났다. 그러나 POP-A-Lock 직원이 왔다고 해서 문을 바로 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손길이 더 필요했는데, 다행히 한인 식당 직원들이 도와주셔서 문을 열 수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차를 타고 핸드폰을 보니 동생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20통이나 와있다.
정말 끔찍한 하루였다.
다만 희한하게도 그날은 내게 절망으로만 기억되는 날이 아니다. 그 비참한 상황 속에서 사랑이의 의연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차 문을 열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엄마가 자신의 무능력함을 자책하고 상황을 탓할 때 우리 사랑이는 내 옆에서 보채지도 않고 얌전히 앉아 웃는 낯으로 상황이 해결되길 기다려줬다.
그것만으로도 사랑이에게 얼마나 고맙던지. 사랑이가 조금 커서 그랬을지, 아니면 엄마의 힘든 마음을 읽어서였는지 아직도 알 수 없지만 아이는 정말 대견하게 나와 그 지옥 같던 5시간을 잘 버텨줬다.
아빠 없이 커온 그 시간, 엄마와 단단한 동지애 같은 것이 생긴 걸까? 의젓한 아이로 자라줘서 참 기특하면서도, 미안한 마음도 많이 들었다. 힘들고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할 아빠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아이… "이럴 때 아빠가 있었다면 어땠을까?"라고 물어볼 법도 한데, 사랑이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엄마와 함께 힘든 이 상황을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이는 날 어떤 눈으로 바라봤을까? 그리고 앞으로 이 사건을 어떻게 기억할까? 엄마가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을 끝까지 보호하고 책임지려고 했다는 것을 느꼈을까?
에이, 아무렴 어떤가. 앞으로도 쭉 내가 이 아이를 지킬 건데.
마트 주차장 벤치에 쪼그려 앉아 하염없이 차 문 열어줄 사람만 기다리고 있던 그때, 나는 사랑이에게 내 외투를 벗어 아이를 감쌌다. 솔직히 나도 너무 추웠다. 하지만 엄마 마음이 다 그렇듯 나보다는 자식이 먼저 아닌가. 나 추운 것보다 아이 추운 게 더 마음 아팠다.
그때 사랑이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엄마가 이 옷 입고 그냥 나 안아주세요.“
이렇게 예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아이가 내 딸이라니… 절망 속에서도 감사와 사랑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앞으로 누군가가 내게 또 “Where is your husband?”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I don't have a husband. but, I have a wonderful daughter.”(나는 남편이 없어. 하지만 내겐 아주 멋진 딸이 있지.)
*칼럼니스트 차은아는 7년째 혼자 당당하게 딸아이를 키우고 있다.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어설픈 아메리카 마인드가 듬뿍 들어간 쿨내 진동하는 싱글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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