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부는 일찍 가"… 배려 걷어찬 나는 '모지리'였다
"임신부는 일찍 가"… 배려 걷어찬 나는 '모지리'였다
  • 칼럼니스트 윤정인
  • 승인 2019.12.10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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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과학자 생존기] 격동과 혼돈의 임신 초기

임신을 확인하고, 내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은 회식자리에서 "저 임신했습니다!"라고 지도 박사님 이하 팀에 오픈하는 것이었다. 보통 임신 초기에는 유산이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아기집이 생기고 태아가 자리잡기 전까지는 알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아기집이 보이기도 전, 혈액검사만으로 임신을 확인한 뒤 바로 그 사실을 공개하였다.

왜? 공개한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임산부이기 이전에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는 현장 과학자였기 때문이다. 현장 과학자. 말이 과학자지 현장에서 실험을 업으로 삼고 산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나는 특히나 유기화학자였기 때문에 내가 실험실에서 고개를 싸악 돌리면, 예쁜 시약병들이 자신들이 가진 정체성을 간단한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그 그림들은 대개 이러하다.

실험실에 늘 존재하는 해골마크 달린 귀여운 시약이들 ⓒ윤정인
실험실에 늘 존재하는 해골마크 달린 귀여운 시약이들 ⓒ윤정인

해골이 그려져 있거나(먹으면 죽는다), 혹은 불이 그려져 있거나, 혹은 흡입독성이 있거나 대개 그랬다. 그리고 간혹 방사선이나 고자기장이 나오는 실험장비를 사용해야 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로 임산부나 혹은 태아에게 딱히 좋을 것 같지 않은 것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런 곳에서 내가 최대한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내가 마스크를 끼고 실험복을 입는다 한들, 내 옆의 동료가 유독물질을 흄후드(fume hood, 실험실 내 먼지, 연기, 유해가스 등을 배출해 화학물질의 노출로부터 작업자를 보호하는 장치 - 편집자 주) 밖으로 꺼내서 사용한다면 나는 그 물질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하튼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로 나는 다른 사람보다 무진장 빠르게 임신을 확인하고 임신 사실을 오픈했다. 그리고 다행히 나의 랩(lab, 연구실) 박사님들은 함께 "축하해!"를 외쳐주시고 임신부인 나를 케어하기 위한 미팅을 다음 날 개최해주셨다.(사실 다음 날이 랩미팅이었던 것은 안 비밀.)

랩미팅 후 주제는 "나"였는데 우리 팀의 케어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OO 씨, 이제 늦게까지 남지 말고 집에 일찍 가."

(그러나 실제로는 실험이 안 끝나서 퇴근을 못함.)

"OO 씨 임신했으니까 앞으로 컬럼(유기합성연구에서 이용하는 실험방법 중 하나로, 긴 관에 실리카겔을 채워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실험) 하지 마."

(남이 컬럼해준 게 망해서 결국 내가 컬럼을 하다보니 의미가 없었음.)

"OO 씨 임신 중이라고 하니까, 지금 랩 업무 맡은 거는 다른 사람들한테 인수인계해둬."

(사람을 못 믿는 내 성격으로 인해 내가 다시 일함.)

아, 이렇게 훈훈할 수가. 하지만 박사님들은 모르는 비하인드가 있다. 내가 이대로 케어를 받았다면 참으로 아름다웠겠지만, 나는 일반 사무직이 아니라는 거. 박사 4년 차, 랩에서 가장 연차가 오래된 박사과정 학생이었다는 거. 결국 임신하기 전보다 나름 업무강도가 줄긴 했으나, 사실 많이 줄이지는 못했다.

또한 대부분의 임신한 여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모두가 나를 배려해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증명하고 싶었다. 내가 임신으로 인해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일을 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인 애엄마가 아니라 여전히 실험을 킹왕짱 잘하는 "나"라는 것을 반드시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야근할 일이 없었지만 석사 학생들 공부를 봐주겠다며 야근을 했고, 실험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야기 들었지만 실험을 했다. 무리하지 않는다고 노력하고 노력해도 몸에 무리가 갔을 것이다. 그리고 무리가 갔다는 사실은 임신 9개월에 임신중독증에 걸리면서 깨달았다.

나는 '모지리'였다. 누군가는 배려를 받을 수 없는 환경일 수도 있고, 그래서 일을 그만두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찌 되었건 좋은 동료들 덕분에 아이와 나의 건강에 보다 더 신경을 쓸 수 있던 환경이었다. 그런데 그 좋은 기회를 내가 내 발로 걷어찼다. 혹시라도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될까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 증명하고 싶었다, 임신 때문에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게 아니라고

지금 내가 그 사실을 후회하는 것은, 나의 행동으로 인해 당시 내 동료들은 '임신을 해도 실험을 그전과 똑같이 할 수 있다'라는 편견을 갖게 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편견으로 인해 다른 임신부 과학자들이 '엄살 부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 당시 그 배려를 그대로 받아 아이와 나의 건강에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내 뒤에 오는 다른 후배들은 나와 같은 배려를 받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멍청해도 그렇게 멍청할 수가 없는 짓을 하고 만 것이다, 나는. 이 기회를 빌어 후배 과학자들에게 참으로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전해본다. 나는 이렇게 멍청하게 굴었지만, 내 글을 읽는 다른 이들은 절대로 나같이 멍청한 짓은 하지 않길 바란다.

임신을 하면 몸이 아픈 게 당연하다. 생각해보자. 사실상 아기는 나의 몸에 붙어 내 양분을 쪽쪽 빨아간다. 내가 숙주인 셈이다.(사실 임신기간에 나는 '에일리언' 영화가 그렇게 떠오를 수가 없었다.) 내가 임신기간 동안 먹고 싶었던 것들은 아이에게 영양분으로 모두 공급이 되는 거고, 내가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 모두가 아이에게 전달된다.

심지어 임신을 하면 면역력도 떨어진다. 덕분에 산모는 늘 골골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약도 맘대로 못 먹는다 (난 참고로 임신 후 두드러기란 걸 얻었다.) 난 환자가 맞았는데! 분명 환자인 건데! 그렇게 인정하면 안 될 것 같아서 포기한 거다. 내 정당한 권리를 멍청하게 포기한 셈이다. 우리 모두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말자.

사람들은 임신을 하면 그냥 배만 툭 튀어나오고, 임신 전과 딱히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2인분을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도? 그래서 임신부를 배려하라는 사회 문화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나 역시 임신부를 특별히 배려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 중 하나다. '굳이…'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어릴적부터 들은 가부장적인 생각들로 가득 차 임신은 별 게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이 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고 4남매의 어머니이신 우리 김여사(=우리 어머니)에게 엄청나게 혼났다.

임신은 별 게 맞다. 유별나게 케어가 되어야 맞다. 배에다가 15킬로그램 달고 다니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닌데다가, 호르몬의 변화와, 자궁 크기의 변화로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배려를 받아야 하는 대상은 임신부뿐만이 아니다. 그 안에 있는 태아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는 그냥 태어나지 않는다. 지하철에서 만나는 어르신들은 간혹 '옛날엔 밭에서 김매다가 애 낳았다', '요즘 것들은 애 하나 가지고 유난 떤다' 하시기도 하는데, 꼭 기억해주시면 좋겠다. 옛날엔 그래서 많이 죽었다. 애도 죽고, 산모도 죽고.

세상이 변해서 임신부를 배려하고 태아를 배려한 덕분에 요즘 안 죽는 거다. 옛날에 백일잔치나 돌잔치를 왜 했는지 잘 기억을 못하는 분들이 계시는 듯해서 하는 소리다.

요즘 여의도 계신 분들도 이런 걸 잘 기억 못하시는 듯한데, 본인들께서 운이 좋아서 그때 살아남은 사람이란 것을 기억해주시면 좋을 듯하다. 그래야 정신 차리고 저출산 정책을 논할 것이 아닌가. 태어난 아이도 지키지 못하고, 임신한 사람들도 케어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저출산을 운운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를 말이다.

*칼럼니스트 윤정인은 대학원생엄마, 취준생엄마, 백수엄마, 직장맘 등을 전전하며 엄마 과학자로 살기 위해 "정치하는엄마들"이 되었고, ESC(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에서 젠더다양성특별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프로불만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은 회사 다니는 유기화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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