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에는 연락하겠다"는 친구가 아직도 소식이 없다. 어찌 된 일인지 궁금했지만 기다렸다. 집안 문제인 것 같은데 친구는 별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다는데 굳이 캐묻지 않았다. 도움은 나 편하자고 아무 때나, 아무 걸로 하는 게 아니라고,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는 도움이어야 한다'고 책에서 읽었다. 크게 공감하며 읽었으니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했다. 친구가 넘어오지 말라고 그어놓은 선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그게 벌써 지난 1월의 일이었다.
잠수 탄 애인을 기다리듯 전화통 붙잡고 안절부절 하며 기다린 건 아니었다. 나는 나대로 살았다. 코로나19로 꼼짝없이 집안에 갇혔으니 친구도 그럴 거라고 여겼다. 내가 그렇듯 친구도 두 아이들 챙겨가며 별일 없이 잘 살겠거니 했다. 가끔씩 생각날 때마다 전화도 하고, 문자도 했지만 "3월에 연락하겠다"는 친구는 좀처럼 응답을 하지 않았다.
◇ 네게 필요한 도움을 주고 싶었는데, 내가 주고 싶은 도움만 줬다는 후회
그 사이 4월이 됐다. 여전히 연락은 없었다. 5월이 됐을 때 그를 알고 있는 다른 친구 O를 만났다. 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한 친구들이다. 열여섯에 만나 마흔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 서로의 일상을 공유해 온 지도 30년이 다 되어 간다. 그런 친구와 카톡만 했을 뿐 반년이 넘도록 전화 연락이 닿지 않는 건 처음이었다. O와 만나자마자 친구 이야기가 나온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O와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분명 힘든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친구의 '사생활'을 존중한다는 이유로 너무 방치한 건 아닌가 싶었다. 조금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부랴부랴 연락을 다시 했다. 슬슬 달래다가 협박도 했다.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전화는 받지 않던 친구가 문자를 보냈다. "잘 지내니 걱정 말라"는 내용이었다. 벌써 5개월째 그 말만 믿고 기다렸는데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살아 있는 건지 목소리만 들려달라고 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고 했다. 얼마 후 친구 번호가 떴다.
"나야."
떨리는 목소리. 우는 것처럼 들렸다. 울먹이고 있었다. 나는 벌써 울고 있었다. 이 전화는 대체 어디서 하는 건지, 왜 연락을 안 하고 있는 건지 묻고 싶은 것도 많고 듣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됐다, 목소리 들었으니 됐어. 끊을게" 하고 서둘러 끊었다. 마치 통화하면 안 될 사람인 것처럼. 드라마에서 많이 보던 장면 같은데 텔레비전 화면 속이 아니라 내 친구의 일이라는 게 너무너무 속상했다.
'뭔가 더 말하고 싶었던 거면 어쩌지? 순진하게 내가 너무 서둘러 전화를 끊었나'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냥 가만히 들어줄 걸. 「가만히 들어주었어」(코리 도어펠드 글·그림, 북뱅크, 2019년)에 나오는 토끼처럼 친구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숨소리만 들려줘도 전화기만 들고 있을 걸, 그렇게 몇 분이라도 더 들어주고 있을 걸. 네 곁에 우리들이 있다고 느껴지게. 마음으로 따뜻하게. 그랬으면 혹시 말하지 않았을까. 하고 싶은 말, 해주지 않았을까.
그림책 속 주인공 테일러는 나무 블록으로 뭔가 만들기로 했어. 새로운 거. 특별한 거. 놀라운 거. 다 완성했을 때 참 뿌듯했지. 갑자기 새 떼들이 나타나 모든 게 무너지기 전까지는 말이야. 무너진 성 앞에서 테일러는 쪼그리고 앉았어. 한눈에 봐도 슬픈 얼굴이었지. 닭이 나타나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지만 테일러는 말하고 싶지 않았어. 다음엔 곰이 나타나서 화가 날 때는 소리를 질러보라고 말했지만 테일러는 소리를 지르고 싶지 않았어. 코끼리는 자기가 고쳐주겠다며 어떤 모양이었는지 떠올려 보라고 말했지만 테일러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어.
그 뒤로 하이에나도, 타조도, 캥거루도, 뱀도 모두 테일러를 돕고 싶었지만 테일러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어. 결국 친구들은 모두 가버렸지. 테일러는 혼자 남았지만 곁에는 토끼가 있었어. 너무 조용히 와서 언제 왔는지도 모르는 토끼는 그저 테일러 옆에 있어 줬어. 테일러가 따뜻한 온기를 느낄 때까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둘은 그냥 조용히 있었어. 그때 테일러가 말하지. “나랑 같이 있어 줄래?” 그 후로도 여전히 토끼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듣기만 했는데 테일러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대체 토끼가 어떻게 했기에 그런 걸까.
처음 이 그림책에 대해 들었을 때는 토끼의 모습만 보였다. 다시 찬찬히 읽으니 테일러의 모습으로 있을 친구가 생각났다. ‘대체 혼자서 얼마나 힘들까’ 친구라고 모를 리 없다. 생일마다 만나는 모임에서 “이렇게라도 너희들에게 말하고 나니 속이 좀 시원하다”라며 속마음을 털어놓곤 했으니까. 그런 친구가 입을 닫고 마음도 닫았다. 그저 기다려달라면서. 그러니 지금 그 속이 얼마나 힘들 것인가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친구도 테일러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해 본다. 나의 관심이 친구에게는 닭이나 곰, 코끼리처럼 ‘도움이 안 되는 도움’일지도 모른다. 친구에게 누구보다 ‘도움이 되는 도움’을 준 토끼 같은 친구이고 싶다. 친구 목소리를 겨우 들은 그날 나는 문자를 하나 남겼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라고.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날까지 토끼의 마음으로 기다려야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도움이 그것뿐이라면.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기자로,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연재기사를 모아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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