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방 속의 너를 살리지 못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여행가방 속의 너를 살리지 못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 기고=장하나
  • 승인 2020.06.08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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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장하나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

엄마라는 사람이 열어놓은 가방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모르는 어린이의 얼굴이 자꾸 떠오릅니다.

어둡고 숨 막히는 암흑 속에서 타들어갔을 아이의 고통. 얼굴 가득 절망의 울음을 터뜨렸을 사람의 마지막 숨결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동학대 신고가 되어도 자신을 때린 사람을 다시 따라갈 수밖에 없는 모질고 잔인한 세계를 우리는 부수어야 합니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아 세상을 떠난 어린이에게, 살리지 못한 못난 어른이라서 정말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며칠째, 일을 하다가도 문득 그 어린이를 생각하면 가슴에 쥐가 나는 것 같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어린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나로부터 이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또 다시 잃게 될 것입니다.

지난 1일 충남 천안시에서 아홉 살 어린이가 약 7시간 동안 여행가방에 감금되는 등 가정 내 학대를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어린이는 이틀 뒤 숨지고 말았습니다.

여행가방이나, 학대가 지속된 가정은 어린이가 있어선 안 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아동학대 피해아동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갈 곳이 있습니까?

2019년 10월 어린이가 다니던 학교에서 아동학대 정황을 먼저 포착하고, 어린이의 가정에 연락을 취했다고 합니다. 지난달 5일 어린이날에 응급실에 온 어린이를 보고 아동학대를 의심한 병원 측에서 경찰에 신고했지만, 가정으로 출동한 경찰과 아동보호전문기관(이하 아보전) 상담원은 부모가 학대 사실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말만 듣고 어린이를 두고 나옵니다.

제대로 된 사회안전망이 있었다면 어린이는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 그 어린이를 생각하면 가슴에 쥐가 나는 것 같습니다 

충남 천안시에서 9세 아동이 약 7시간 동안 여행가방에 감금되는 등 가정 내 학대를 당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베이비뉴스
충남 천안시에서 9세 아동이 약 7시간 동안 여행가방에 감금되는 등 가정 내 학대를 당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베이비뉴스

과거에는 아동학대를 집안 문제로 치부하고 주변에서 개입하기를 꺼리거나 쉬쉬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아동학대 문제 해결이 어려웠다면, 지금은 어린이집·유치원·학교 등 보육·교육기관이나 경찰·아보전 등 조사·수사 기관, 병원 등 의료기관에서 아동학대 상황을 인지하고 개입했음에도 피해아동을 방치해서 희생에 이르게 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이는 아동학대 재범률 증가와 피해의 심각성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국의 현실은 가해자와 피해아동을 분리하기는커녕, 가족이 가해자로 기소된 아동학대 사건 중 절반 이상이 집행유예를 선고받습니다. 집행유예 판결 사유는 ‘생계 부양 필요’가 가장 많고, ‘훈육 목적의 학대’ 등이 있습니다.

2015년 30대 여성이 자신이 낳은 아기를 욕조에 빠뜨려 죽인 뒤 쓰레기봉투에 넣어서 화장실 쓰레기통에 버린 사건이 있었지만, 법원은 이 여성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습니다. 죽은 아기의 형제 두명을 양육해야 한다는 이유로 법원은 집행유예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비극은 반복되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아동·청소년은 부모(양육자)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어떤 부모(양육자)를 만났든 간에 모든 아동·청소년은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그 권리를 보장할 1차 책임은 부모(양육자)가 아닌 국가에 있습니다.

◇ 학대 피해아동을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원가정보호의 원칙’

전문가들은 아동복지법 제4조제3항의 ‘원가정보호의 원칙’이 과도하게 적용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아동복지법 제4조(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
③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아동이 태어난 가정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아동이 태어난 가정에서 성장할 수 없을 때에는 가정과 유사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조치하며, 아동을 가정에서 분리하여 보호할 경우에는 신속히 가정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지원하여야 한다.

아동·청소년이 원가정에서 성장하도록 지원하는 이유는 그것이 아동·청소년에게 가장 바람직하다는 전제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말할 필요 없이, 학대 가정은 결코 바람직한 환경이 아닙니다. 적극적인 가해자-피해아동 분리 조치를 통해 피해를 최소화해야 합니다.

경찰과 법원이 가족에 의한 학대 피해아동과 그 가해자를 다시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이유는 ‘원가정보호의 원칙’ 때문만은 아닙니다. 대한민국에는 피해아동을 안전하게 보호할 장치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아동복지시설 내 아동학대 및 인권침해가 비일비재하고, 그래서 시설에 거주하는 아동·청소년들 중 일부는 십대가 될 무렵 시설을 이탈하여 거리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거리에서 범죄의 대상이 되고, 범죄에 연루되기도 합니다.

2003년 우리나라도 가정위탁제도를 도입했습니다. 2019년 기준 위탁가정은 8955세대이고, 위탁 아동 수는 1만 1141명입니다. 그러나 전체 위탁가정 중 조부모 대리양육 및 친인척 위탁가정을 제외한 무연고·비혈연 일반위탁가정은 767세대(914명)에 불과하고, 이는 2010년 936세대(1164명)보다 오히려 줄어든 수치입니다. 원가정에 대한 집착과 대안 부재가 가정 내 학대 피해아동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 처벌 강화만으로 아동학대를 예방하기 어려운 까닭

“너무 늦었지만, 너는 소중한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아주렴” ©베이비뉴스
“너무 늦었지만, 너는 소중한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아주렴” ©베이비뉴스

현행 아동복지법 제45조제2항에 따라 전국 243개 광역·기초 지방자치단체에 아보전을 설치해야 한다고 명시돼있지만, 예산 부족을 이유로 2018년 기준 단 62개 지역에만 아보전이 설치돼 있습니다.

아보전 인력 1인이 담당하는 아동 수도 선진국에 비해 열악한 수준입니다. 2017년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국회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아보전 상담원 1명이 담당하는 아동 수는 6360명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1인당 1820명보다 3.5배 많은 수준이라고 합니다.

처벌 강화만으로 아동학대를 예방하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아동학대를 근절할 수는 없지만, 피해를 최소화하고 피해아동의 재활에 시간과 노력과 재정 투자를 쏟아야 합니다.

현재 지자체의 민간 위탁으로 운영되는 아보전은 상담원 등 직원의 평균 근속기간이 2년 미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보전 인력을 확충하는 동시에 처우개선 및 고용보장이 이뤄지지 않으면, 피해아동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한 아동심리 파악 및 검사·상담 등의 서비스와 장기간 근속을 통해 쌓이는 사례전문성 등을 제고할 수가 없습니다.

2014년 14명, 2015년 16명, 2016년 36명, 2017년 38명, 2018년 28명. 5년 동안 아동학대로 사망한 아동이 132명입니다. 132명, 가슴을 칩니다. 나 역시 지나가는 슬픔과 분노에 그치지 않았었나, 고개를 들기 힘듭니다.

“미안하다. 고통의 울부짖음을 듣고도 다시 그 지옥 같은 가정으로 돌려보내서. 그동안 무관심해서 미안하다. 너무 늦었지만, 너는 결코 폭행을 당해서는 안 되는 소중한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아주렴.”

이제는 정말 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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