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 35% 포기하고 '엄마' 과학자의 삶 선택했다
연봉 35% 포기하고 '엄마' 과학자의 삶 선택했다
  • 칼럼니스트 윤정인
  • 승인 2020.07.28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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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과학자 생존기] 당연해야 할 '부모의 시간'에 대하여

신랑이 먼저 재취업에 성공하고, 나도 열심히 구직에 나섰다. 면접도 열심히 봤다. ‘자체’로 시행한 육아휴직 덕에 땡그리와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에, 다음 회사를 선택하고 지원하는 일에 무척 신중히 임했다. 밤마다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나의 ‘이직 조건’에 대해 깊은 토론을 나눴다.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연봉을 택할게. 당신은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곳으로 가. 연봉은 적어져도 괜찮아.”

솔직히, 신랑보다 적은 연봉 받는 일은 자존심 상했다. 그런데 틀린 말이 아니라서 반박할 수 없었다. 부모 중 한 사람이 연봉을 택한다는 건 시간을 버린다는 이야기다. 그럼 다른 한 사람은 시간을 택하는 게 맞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원만한 합의(?) 후 각자의 메리트를 살릴 수 있는 직장에 다니기로 했다.

내가 세운 나의 이직 조건은 나름 까다로웠다.  

▲유기합성 연구 ▲기왕이면 의약품 합성이나 소재 합성 ▲박사 타이틀 활용 가능한 포지션 ▲다양한 이유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결근, 조퇴, 휴가 사용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적에 대한 과도한 압박이나, 근태에 대해 괴롭히지 않을 것 ▲참, 야근은 불가능 ▲대신, 연봉은….

사실 이게 까다로운 조건인가? 심플하게, 연구직이면서 9시 출근, 6시 퇴근할 수 있는 곳이면 된다는 것이다. 다만 근무 환경이 너무 ‘타이트’하지만 않으면 좋은데, 연구직에서 이런 조건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내가 지각, 조퇴, 결근을 한다면 그 사유 대부분은 육아 때문일 것인데, 그런 걸 문제 없이 받아줄 수 있는 곳을 찾는 게 어려웠다. 아이 유치원 학부모 회의나 운동회 때문에 휴가 쓰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회사를 찾는 게 그렇게 어려웠다.

이상하게 연구직엔 일찍 출근해서 늦게 퇴근하는 걸 좋아하는 분들이 많다. 과거의 나와 남편이 그랬듯, 이런 문화가 연구직엔 아직 많이 남아있다. 특히 우리 부부가 속한 유기합성 분야는 벤처에서 주로 연구하다 보니, 그런 분위기가 더 강하다. 회사 규모가 작고, 적은 인원으로 연구하다 보니 사람 갈아 넣어 연구를 진행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취업 전선에 나선 엄마, 면접 자리에서 당당히 '애 데리러 가야 하니 정시 퇴근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엄마만큼 '깡' 센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월드스타도 이렇게는 못 할걸. 비 '깡' 뮤직비디오 화면 갈무리. ⓒ지니뮤직
취업 전선에 나선 엄마, 면접 자리에서 당당히 '애 데리러 가야 하니 정시 퇴근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엄마만큼 '깡' 센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월드스타도 이렇게는 못 할걸. 비 '깡' 뮤직비디오 화면 갈무리. ⓒ지니뮤직

이러니 정시출근, 정시퇴근해야 하는 아이 엄마를 반길 리 있나. 그래도 나는 면접 볼 때마다 아이가 있음을 대놓고 어필했다. 

‘배 째라. 나 애 엄마다. 애 어리다. 애가 네 살밖에 안 됐는데(당시 네 살. 지금은 일곱 살) 뭐 어쩔 것이냐.’

스스로 이런 ‘깡’을 탑재해 면접에 참여하면 자존감도 높아지고, 면접에서 ‘까였을 때’도 덜 속상했다. 까일 때마다 “회사 골라가라”라고 조언해준 지도 박사님 말도 되새겼다. 이런 과정은 구직 과정에서 낮아진 나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그렇게 한 스타트업 회사에 입사하게 됐다. 

◇ "아이는 당연히 부모가 키워야 한다"던 대표… 이 회사 놓치기 싫었다 

‘이 회사’에 입사한 이유, 면접에서 만났던 대표 때문이다. 당시 면접이 어찌나 인상적이었는지, 이제 갓 1년 된 회사에 겁도 없이 들어간 것이다.

사실 그동안 나는 수많은 회사의 수많은 면접관에게 비슷한 걱정을 수없이 들었다. 

“아이가 아직 어리네요.”

“애가 아직 엄마 손이 필요한 나이인데, 누가 육아를 좀 도와주시나요?”

“아이가 어려서 출장 다니기 어렵겠어요.”

“아이가 이렇게 어린데, 야근할 수 있어요?”

회사는 다른데 왜 이렇게 묻는 건 비슷한지…. 하도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아서 답변도 미리 정해놨다.

“네. 우리 애가 아직 어립니다.”

“아이는 제가 직접 키웁니다.”

“제가 출장 가면 남편이 보면 됩니다. 출장이 길어질 땐 친정 부모님이나 시누이에게 부탁할 수 있습니다. 크게 문제 될 일 아닙니다.”

“실험 일정 때문에 문제가 있어 늦어진다면 남편이 아이를 픽업하면 됩니다. 중요한 건 야근 안 하게 실험 일정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대답을 이렇게 했기 때문에 그동안 면접 봤던 회사들과 인연이 끊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굳이 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아이 엄마’이고 싶었고, 아이는 엄마인 나만 키우는 것이 아니었다. 야근은 당연히 하는 일이 아니다. 그동안 내가 면접에서 받은 질문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한테 물을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 

‘이 회사’ 면접을 보러올 때도 ‘그런 질문’ 당연히 듣겠거니 하며 큰 기대감 없이 왔다. 그런데, 달랐다. 면접 때 나한테 ‘커리어’를 물어봤다. 경력기술서의 내용을 내게 물었고, 어떤 연구를 주로 해왔는지 물어봤다. 이미 여기서 감동하고 말았다.

물론 아이 이야기를 묻기도 했다. 아이가 어리다는 말도 당연히 했다. 그런 대화를 마친 후 ‘여기도 다른 곳과 다를 바 없겠구나’ 싶어 인연이 아닌가 보다 했는데, 대표가 이런 제안을 했다. 

아이 키울 수 있는 시간을 줄 테니, 연봉은 못 맞춰 주겠다고.

대표가 제시한 연봉은 이전 연봉보다 35%나 적었다.

그러면서 대표는 아이는 부모가 키우는 게 맞다며, 나는 그러지 못해서 와이프가 고생 많이 했다며, 그래도 우리 와이프가 그 고생을 해서 교수가 됐다며, 나는 그런 와이프를 존경한다며…. 아이와 보내는 시간은 중요하니 당연히 보장하겠다며, 그러니 아이 등하원 시간은 편하게 유지하라고. 

대표의 이 말 때문에 이 ‘거지 같았던’ 스타트업 회사에 입사해 자그마치 3년이나 버텼다. 인생에서 두 번째로 경험한 ‘블랙 기업’이었음에도 3년이나 꾸역꾸역 버텼던 이유는 단 하나. 대표 말마따나, 이 회사에 다니면 그래도 땡그리와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 때문에 연차 쓸 일 있으면 마음껏 쓰라는 회사가 어디 많은가. 마음이 갑자기 급해졌다. 대표 멀쩡해 보이고, 창업 후 바로 연구과제를 두 개나 진행하고 있다고 하니 과제 따는 능력도 있어 보였다. 대표는 내게 연구소장직을 제의하며 하고 싶은 연구가 있다면 같이 해 보자고, 본인도 신약을 했다며, 나중에라도 신약을 하고 싶다는 의지도 내게 강하게 어필했다. 

신약을 하고 싶었고, 아이 돌보는 일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무엇보다 ‘대표 바로 밑 연구소장’직 제안이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나는 연봉 35%를 포기하고 ‘엄마 과학자’라는 삶을 살기로 했다.

◇ 애 엄마가 둘이나 있는 회사가 잘 돼야 업계 분위기가 좀 바뀌지 않겠는가

엄마 실험실에서 색깔 놀이 중인 아들. "아이는 당연히 부모가 키워야지요"라는 대표 덕에 좀 덜 미안한 엄마로 살 수 있었다. ⓒ윤정인
엄마 실험실에서 색깔 놀이 중인 아들. "아이는 당연히 부모가 키워야지요"라는 대표 덕에 좀 덜 미안한 엄마로 살 수 있었다. ⓒ윤정인

아이를 8시 30분에서 9시 30분 사이에 등원시키고 나는 9시 30분~10시 사이 출근했다. 퇴근은 5시~5시 30분 사이에 하고 아이를 데리러 갔다. 그래도 예전보단 일찍 집에 데려올 수 있었다. 적어도 맨 나중까지 어린이집에 남아있는 아이가 아니게 된 것이다. 네 살 아이도 스트레스를 좀 덜 받고, 나도 아이 데리러 갈 때 길 막히는 시간을 피할 수 있으니 좋았다. 무엇보다 아이에게 덜 미안해해도 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면접 봤던 대표는 이제 전(前) 대표가 되었다. 회사는 결국 폐업했다. 생각해보면 대표 덕에 고생도 참 많이 했으나, 그래도 그 덕분에 ‘아이 엄마도 할 수 있는 회사생활’이 무엇인지 경험했다. 그래서 입사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 땡그리와 동갑인 아이를 키우는 엄마 대리님이 함께 있었는데, 나와 그는 이 회사가 망하는 것만은 막아내려고 무척 노력했다. 이 회사가 망하면 안 됐던 강력한 이유가 있다. 이 회사는 반드시 업계에서 살아남아 새로운 ‘역사’를 써야 했기 때문이다. 기술도 기술이지만, ‘경력 단절 여성’, ‘아이 엄마’가 둘이나 있는 이 회사가 살아남아야 업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나와 엄마 대리님이 집안일이나 아이 돌보는 일, 혹은 몸이 아파 출근하기 어려울 때 대표에게 메시지를 보내면 그에겐 늘 같은 답장이 왔다.

“ㅇㅋ.”

다시 복귀하면 아팠던 건 괜찮냐고 물어봐 줬던 사람. 아이를 맡길 곳이 마땅찮아 아이를 회사에 데려와도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고, 그저 “아이 안 다치게 잘 있다가 집에 가라”고 말했던 사람.

이런 일들이 3년간 소소히 쌓여, 나는 대표의 경영능력이 엉망이었음에도 엄마 대리님과 ‘알아서’ 회사를 운영해왔다. 

그와 면접 때 나눴던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아이는 당연히 부모가 키워야지요.”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를 그 대표가 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는 당연히 부모가 키워야 하는 것. 그러기에 부모는 당연히 아이를 위해 시간을 내야 한다는 것. 대표가 우리의 모든 사정에 ‘ㅇㅋ’로 대답했던 이유는 아마, 이런 생각이 저변에 있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참 ‘당연한’ 일인데, 많은 직장인이 이 ‘당연한’ 일을 잘 못 하고 산다. 나는 이 ‘당연한’ 일을 하기 위해 회사를 옮겼고, 연봉을 포기했다. 

부모의 시간은 왜 직장인에게 허용되지 않는가. 왜 저런 대표를 찾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왜 아이를 안 낳냐고? 당연한 ‘부모의 시간’도 제대로 확보할 수 없는 사회에서 어떻게 쉽게 부모의 삶을 결정할 수 있겠는가. 

*칼럼니스트 윤정인은 대학원생엄마, 취준생엄마, 백수엄마, 직장맘 등을 전전하며 엄마 과학자로 살기 위해 '정치하는엄마들'이 되었고, ESC(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에서 젠더다양성특별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프로불만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은 회사 다니는 유기화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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