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 만에 집 탈출… 아이들과 실컷 걷기부터 했다
석 달 만에 집 탈출… 아이들과 실컷 걷기부터 했다
  • 칼럼니스트 김보민
  • 승인 2020.08.27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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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에서 지구인으로 살아가기] 이 더운 나라에서 ‘굳이’ 걸어다니는 이유

싱가포르에 사는 우리는 차가 없다. 한국에서는 출퇴근할 때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했다. 하지만 주말엔 어딜 가나 꼭 자가용을 이용했다. 집 근처 대형마트에 갈 때도, 양평 주말농장에 갈 때도, 서울 시댁에 갈 때도, 꼭 차를 타고 다녔다. 한국에서 자동차는 ‘필수 아이템’이라 여기고 살았다.

싱가포르에 와서 처음 얼마 동안은 차 없는 일상이 어색하고, 가끔은 답답하기도 했다. 갓난아기 등에 업고, 조금만 걸어도 다리 아프다는 아이 달래가며 어디 다니는 것도, 짐 한 보따리 이고 지고 다니는 것도, 무더운 날씨에 온몸이 땀에 젖는 것도,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 그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살아보니 그렇다. 삼 년째 차 없는 뚜벅이 생활을 하면서 요즘은 자동차 없어도 세상 누구보다 밖에서 잘 놀 수 있게 됐다.

참, 싱가포르는 자동차가 꽤 비싸다. 지인을 통해 들은 바로는 우리나라 자동차 브랜드의 보급형 소형차 가격이 여기서는 8000만 원 정도라고 한다. 심지어 중고차다. 소소하게 주말 나들이한답시고 이 돈을 주고 차를 사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판단했다. 차 타고 싶으면 가끔 택시를 타겠다고 마음먹었다. 

다행히도, 싱가포르의 대중교통은 585만 인구가 다니기에 불편함이 없을 만큼 구축이 잘 돼 있다. 지하철과 버스는 싱가포르 대부분 지역에 연결된다. 특히 지하철 엘리베이터에서는 유모차가 배려 대상 일 순위다. 버스는 모두 저상이라 유모차를 싣고 내리기에 아무 문제 없다. 가끔 버스 기사님이 유모차 싣고 내리는 우리를 도와주기도 했다.

◇ 석 달 동안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 "우리 걸어서 가자!" 

지난 6월 싱가포르는 학교와 쇼핑몰, 공원, 박물관 등 공공시설의 문을 다시 열었다.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많이 줄어들고, 관리 가능한 범위에 들어왔다고 정부에서 판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우리 가족도 몇 주 지켜보다 지난달부터 주말에 슬금슬금 나가기 시작했다. 석 달 내리 집에 갇혀 살다가 처음으로 주말 나들이를 결심한 밤, 어디를 가장 먼저 가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들은 모두 싱가포르의 랜드마크 마리나베이샌즈호텔을 보고 싶어 했고, 나는 하염없이 무진장 걸어 보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우선, 자동차와 버스에 흠뻑 빠져 있는 둘째를 위해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집에서 마리나베이샌즈호텔까지는 우리 집에서 버스로 한 시간 30분 정도 걸리는데 다행히 이층 버스 맨 앞에 탈 수 있게 돼서 여행 가는 느낌을 만끽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밖에 나와서 버스까지 타게 된 아이들은 들떠 있었다.

하늘에 뜬 뭉게구름,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과 상점, 노랗고 파란 택시만 봐도 아이들은 즐거워했다. 그렇게 토요 여행이 시작되었고, 매주 금요일 저녁을 먹으며 우리는, 토요일에 다녀올 곳을 미리 정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아이 둘에 각종 짐에, 유모차에, 날씨는 덥고 힘들지만. 그래도 우리가 걷는 이유가 있다. ⓒ김보민
아이 둘에 각종 짐에, 유모차에, 날씨는 덥고 힘들지만. 그래도 우리가 걷는 이유가 있다. ⓒ김보민

세 살, 일곱 살 아이 둘과 물통 네 개, 아이들이 갈아입을 옷가지, 얇은 담요, 기저귀, 물티슈, 간식 등을 모두 2인용 유모차에 실으면 50kg 정도 된다. 성인 여성 몸무게에 버금가는 유모차를 남편과 번갈아 밀어가며 싱가포르 구석구석 걷는다. 지난주에는 이스트코스트파크(East Cost Park)라는 바다 인근 공원에 갔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큰아이가 물었다. 

“우리 지금 어디가?” 

딱히 갈 곳을 정해두고 걷던 길이 아니라 잠깐 주저하며 되물었다.

“글쎄, 어디에 가고 싶어?”

큰아이는 1초도 지체하지 않고 외쳤다. 

“마리나베이샌즈호텔.” 

나도 쿨하게 대답했다. 

“그래, 가자!”

이스트코스트파크에서 마리나베이샌즈호텔까지 얼마나 걸리나 검색부터 했다. 택시로 10분, 버스로 50분, 걸어서 한 시간 30분이었다. 저녁 여섯 시, 늦게 먹은 간식 덕분에 아무도 배가 고프지 않은 상황, 아직 건재한 체력,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래, 걸어서 가자!”

◇ ‘굳이’ 불편하게 살다 보면 ‘온전한 내 모습’ 만난다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밖에서 노는 건 좋은데 굳이 왜 걸어 다니냐고. 계절이라곤 한여름뿐인 이 나라에서, 에어컨 빵빵하게 잘 나오는 쇼핑몰이 많은 이 나라에서, 택시 잡고 타는 게 어렵지 않은 이곳에서, 왜 ‘굳이’ 걷냐는 질문이었다. 글쎄, 삼 년 정도 꾸준히 걸어 다니며 걷는 행위가 주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온몸으로 느꼈다고 말한다면, 대답이 될까.

나는 기본적으로 걷는 걸 좋아한다. 그런데 아이들과 함께 걸으면 신기한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 우선 아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관찰력이 뛰어나고, 느끼는 깊이와 방향이 사뭇 다르다. 걸으면서 나누는 대화는 많은 것들이 정제되어 있고, 멈춰있는 공간인 집이나 식당에서 나누는 대화와는 그 결이 또 다르다. 

하염없이 흐르며 모양을 달리하는 구름을 바라보며, 금방 깎은 잔디밭에서 폴폴 풍기는 풀 냄새를 맡으며, 어디선가 달콤한 냄새를 싣고 날아와 귓가를 스치는 바람을 느끼는 행위에서 우리는 누군가 만들어 놓은 장난감이 아닌 세상에 널린 자연이란 장난감과 더 즐겁게 놀게 되었다. 

걷다 보면 대화의 주제와 방향도 정해진 바 없고 끝이 없다. 오늘의 하늘과 얼마 전 바라본 하늘의 무게가 얼마나 비슷한지, 오늘의 하늘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지, 우린 어떤 모습의 바람과 하늘과 구름을 좋아하는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 아이들과의 대화가 그저 재미있다.

재미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이 작은 아이가 느끼는 소소한 감정들이 불쑥 튀어나올 때 아이가 얼마나 컸는지, 어떤 마음으로 늘 지내는지 엿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어 소중하기까지 하다.  

또, 걷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일들을 겪게 되는 재미가 남다르다. 이스트코스트파크에서 마리나베이샌즈호텔까지 걸어갈 때였다. 갑자기 길이 뚝 끊겨서 지도를 찾아보니 고가 도로를 건너야만 도심으로 넘어갈 수가 있었다.

우리 머리 위 수십 미터 위에 있는 고가 도로를 찾아 올라가는 계단을 찾았는데 무려 아파트 10층 높이였다. 남편은 2인용 유모차를 짊어졌고, 나는 작은 아이를 안고 짐 보따리 몇 개를 짊어졌다. 큰아이는 혼자 올라갈 수 있다며 씩씩하게 앞장섰다. 거의 도착했을 때 큰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이 계단은 진짜 피곤하네.”

계획했더라면, 걷지 않았더라면, 굳이 수고로움을 자처하지 않았더라면, 이 반짝이는 도시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김보민
계획했더라면, 걷지 않았더라면, 굳이 수고로움을 자처하지 않았더라면, 이 반짝이는 도시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김보민

모든 짐을 다시 유모차에 싣고 아이들을 앉혀 고가 도로 옆 인도를 걷는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생각도 못 했던 10층 높이 계단을 우리는 에베레스트라도 오르는 것처럼 씩씩하게 올라왔고, 덕분에 마치 디즈니랜드 성으로 들어가듯 반짝이는 싱가포르의 도심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마치 디즈니랜드 성에 온 것처럼 함성을 지르며 즐거워했다. 우리가 미리 계획했다면 굳이 애써 이곳을 걸어 올라왔을까? 걷다 보니 오게 된 길들, 만난 풍경들이 주는 즐거움, 걷는 즐거움은 여기에 또 숨어 있었다. 

종일 걷고 집에 오는 길에 핸드폰으로 걸음 수를 확인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보통 2만 5000보 정도를 걷는데, 이날은 버스를 오래 타서 2만 걸음도 못 걸었다. 우리는 마치 목표를 달성하지 못 한 사람들처럼 아쉬워한다. 그리고 다음엔 다른 코스로 걸어보자며 다음 토요일 일정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싱가포르에서 삼 년 걷는 동안 아이들이 많이 자랐다. 비 오면 비 피하며 놀 줄 알고, 제 물통도 곧잘 챙기고, 걷다가도 놀 곳을 잘도 찾아낸다. 아이들만 더 잘 놀게 된 것이 아니다. 나도 더 잘 걷게 되었고, 남편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걸으며 더 많은 생각을 정돈하게 되었다.

가끔, 우리의 편리함을 채워준 물건들을 뒤로하고 조금 불편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불편함 뒤에 온전한 내 모습을 만나는 순간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번 토요일에는 또 어디를 걷고 있을까? 

*칼럼니스트 김보민은 '한국땅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산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라는 호기심으로 2년째 싱가포르에 체류 중이다. 싱가포르에 올 때 4살이던 첫째와 생후 2개월이던 둘째는 어느덧 각각 6살, 26개월로 훌쩍 자랐다. 365일 여름이고, 아시아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주로 영어를 쓰고, 작은 나라이면서도 어마어마하게 큰 아시아를 가르쳐주고 있는 싱가포르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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