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그래도 돼요?” 네, 엄마도 사람이니까
“엄마가 그래도 돼요?” 네, 엄마도 사람이니까
  • 칼럼니스트 최가을
  • 승인 2020.09.04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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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엄마의 방구석 심야 영화관] '해피 이벤트'(2011)

프랑스 영화 ‘해피 이벤트(A Happy Event, 2011)’는 임신·출산·육아의 모든 과정을 적나라하게, 더없이 현실적으로 그린 영화다. ‘임출육’ 3종 세트에 대한 낭만도 없고, ‘자고로 엄마란 이래야지’라는 가식도 없다.

나를 엄마로만 보지 말고 사람으로 봐 달라는, 자칭 페미니스트 엄마인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깨달았다. 아, 난 아직도 ‘모성애 강국’ 한국 엄마구나. 난 아직도 엄마라는 존재를 온전한 인간으로 보고 있지 않구나.

◇ "아니 저렇게까지…" 내 안의 '한국 여자'를 산산이 무너트린 영화

해피 이벤트(A Happy Event, 2011), 레미 베잔송 감독, 루이즈 보르고앙·피오 마르마이 주연. ⓒ(주)마운틴픽쳐스
해피 이벤트(A Happy Event, 2011), 레미 베잔송 감독, 루이즈 보르고앙·피오 마르마이 주연. ⓒ(주)마운틴픽쳐스

주인공 바바라는 철학과 박사과정 학생이다. 동네 DVD 가게를 들락거리다가 그곳의 아르바이트생 니콜라스와 사랑에 빠진다. 둘은 동거하다가 아기를 갖게 되지만, 현실은 낭만적 사랑의 결실로 아기를 기다렸던 둘의 바람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영화는 기대와 다른 현실과 맞닥뜨려 고군분투하는 바바라의 모습을 일체의 미화 없이 그린다.

우선, 임신한 모체의 몸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아름다운 D라인’ 같은 건 없다. 배가 남산만큼 불러서 일어나고 싶어도 일어나질 못하고 몸을 침대 가장자리로 낑낑대며 옮기다가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는 여자가 있을 뿐이다. 속옷만 입은 임신부의 몸이 드러나는 장면을 내 안의 한국 여자는 불편했다. “저렇게까지 다 보여줘야 해?” 영화는 대답한다. 

“이 몸도 사람의 몸이야.”

'아름다운 D라인'이란 건 사실 없다. 영화는 그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주)마운틴픽쳐스
'아름다운 D라인'이란 건 사실 없다. 영화는 그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주)마운틴픽쳐스

바바라는 친정엄마와 언니에게 임신 사실을 숨기려고 임신부 아닌 척 담배를 피운다. 니콜라와 싸우다가 가운뎃손가락을 올려 날린다. 의사한테 “난 자궁이 아니라 인간이에요!”라고 외친다. 바바라는 참지 않는다. 실수하고, 화내고, 짜증 낸다. 그녀도 사람이니까 감정을 분출하는 건 당연한데, 그 모습이 왜 그리 낯설게 느껴졌을까.

한국 사회에서는 속으로 삭이다가 정신병까지 걸리는 ‘82년생 김지영’도 비난받는다. 집도 살 만하겠다, 남편도 착하겠다, 그렇게까지 우울해할 이유가 뭐냐고. 한국의 엄마들은 분노는커녕 우울해하기만 해도 이해받지 못한다. 바바라 같은 여성 캐릭터가 한국 영화에 등장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바바라는 성욕도 참지 않는다. 영화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성욕이 폭발한 임신부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임신 중 부부관계를 하다가 남편이 아기가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못하겠다고 하자, 친구와 자위 도구 쇼핑을 한다.

맞다. 사람에겐 욕구가 있지. 엄마도 사람인데 우리는 임신부라는 존재는 성욕이 없는, 혹은 없어야만 하는 존재로 상정한다. 임신 중인 아내를 둔 남편의 성욕은 이상하다고 비난하지 않고, 금욕해야 하니 안쓰럽다고까지 말하면서.

◇ 프랑스 여자는 우리랑 좀 다를 줄 알았는데, 같으면 어쩌란 거야

이렇게 당당한 바바라도 육아, 수유, 경력단절에 덫에 걸린다. 사회에선 설 곳을 잃고, 가정에선 자아가 사라진다. ⓒ(주)마운틴픽쳐스
이렇게 당당한 바바라도 육아, 수유, 경력단절에 덫에 걸린다. 사회에선 설 곳을 잃고, 가정에선 자아가 사라진다. ⓒ(주)마운틴픽쳐스

그러나 이렇게 당당한(?) 바바라도 출산 후에는 옴짝달싹 못 하고 육아의 개미지옥에 빠져버린다. 거의 확정된 것만 같았던 조교수 자리를 다른 남자 박사과정생에게 뺏기면서 경력단절의 덫에 걸린다. 바바라는 모유수유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육아를 혼자 도맡으면서 집에 갇혀버린다. 사회에서는 인정받던 자신의 자리가 없어지고, 가정에서는 개인으로서의 자아가 사라진다.

자존감을 얼마나 잃게 되냐면, 산부인과 의사가 회음부가 ‘근육질’이라고 말하자 “출산 이후 자신의 몸에 대해 들은 최초의 칭찬”이라면서 눈물을 흘린다. 내 안의 한국 여자가 이번엔 절규했다. 프랑스 엄마들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선진국 고학력 여성도 우리랑 똑같으면 대체 어디에서 희망을 찾으란 말인가.

이런 생활이 1년 정도 계속되자 커플(바바라와 니콜라스는 결혼하지 않았다)의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고, 둘은 이별을 고려한 별거에 들어간다. 바바라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자, 니콜라스는 갑자기 부성애가 폭발했는지 딸은 두고 나가라고 엄포를 놓는다. 그러자 바바라는 정말로(!) 애를 니콜라스에게 맡기고 엄마네 집으로 간다.

내 안의 한국 엄마가 경악했다. “아니 그래도! 애 엄마가 저렇게 애를 덜렁 떼놓고 집을 나가도 되나?” 영화는 이 지점에서 바바라의 죄책감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때로 영화는 어떤 주제에 대해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말한다. 1년 동안 외출도 제대로 못 하고 밀착 육아를 한 바바라가, 왜 꼭 죄책감을 느껴야 하냐고 영화가 내게 반문했다.

‘해피 이벤트’를 보는 내내 내 안의 한국 엄마가 질문했다. “엄마가 그래도 돼요?” 영화는 끈질기게 대답했다. “그러면 안 될 이유는 뭔데요?” 영화는 계속 내가 예상치 못한 대답을 했지만, 거기서 이상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래요, 그래도 돼요. 엄마도 사람이니까.

*칼럼니스트 최가을은 구 난임인, 현 남매 쌍둥이를 둔 워킹맘이다. 영화관에 갈 시간이 없어 아이들을 재우고 휴대전화로 영화를 본다. 난임 고군분투기 「결혼하면 애는 그냥 생기는 줄 알았는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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