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이 '비혼주의자'를 선언한다면
내 딸이 '비혼주의자'를 선언한다면
  • 칼럼니스트 최가을
  • 승인 2020.09.16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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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엄마의 방구석 심야 영화관] '작은 아씨들'(2019)

나는 결혼 전보다 결혼 후에 더 행복한 삶을 살게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 제도라는 것이 여자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낀 적이 많았다. 그래서 이제 두 돌도 안 된, 말문도 트이지 않은 딸을 두고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곤 한다.

내 딸이 이성애자라는 전제로, 웬 ‘놈팡이’와 결혼한다고 하면? 내 일을 존중하고 가사노동을 철저히 분담할 줄 아는 지금의 남편 같은 사람과 결혼해도 결혼 제도의 불합리함을 뼈저리게 느낄 때가 많았는데 내 딸이 그런 불구덩이에 들어가면 어떡하지?

반대로 결혼을 안 하겠다고 하면? 내가 겪어 보니 삶의 파트너가 있다는 건 인생을 더 윤택하게 만드는 일인데 내 딸도 그런 경험을 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결혼은 안 하되 파트너는 있다고 한다면, 30년쯤 후의 우리 사회가 그런 커플에게 충분히 관용적인 곳일까?

◇ 가난한 사랑을 선택한다면? 돈과 결혼을 거래한다면? 이도 저도 아니라면!?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2019), 그레타 거윅 감독, 시얼샤 로넌, 엠마 왓슨 주연. ⓒ소니픽쳐스코리아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2019), 그레타 거윅 감독, 시얼샤 로넌, 엠마 왓슨 주연. ⓒ소니픽쳐스코리아

나는야 딸의 미래에 태평양 같은 오지랖을 부려보는 초보 엄마. 그래서 영화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2019)에서 자기 나름의 이유로 결혼을 선택하거나 거부한 여자 주인공들의 모습이 모두 내 딸의 미래 같았다.

우선 첫째 메그는 가장 전통적인 여성상을 보여준다.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남편과 함께하고 싶다고 하며, 사랑만 보고 가난한 남자와 결혼한다. 메그에겐 배우라는 꿈보다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꿈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낭만적 사랑이 남루한 현실을 완전히 잊게 해주진 못한다. 메그는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가난한 게 지긋지긋하다고 말한다.

메그에겐 개인의 꿈보다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꿈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가난한 가정 교사와 결혼하지만 '지긋지긋하다'고 말한다. ⓒ소니픽쳐스코리아
메그에겐 개인의 꿈보다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꿈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가난한 가정 교사와 결혼하지만 '지긋지긋하다'고 말한다. ⓒ소니픽쳐스코리아

내 딸이 메그와 같은 결혼을 하고 싶어 한다면? 즉 경제적 자립을 이루지 못한 상태로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한다면? 신랑감이 가난하면 너라도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고 직업부터 찾으라고 하며 딸을 말릴 것 같다. 그런데 이건 내가 지금 2000년대를 사는 엄마라서 할 수 있는 말이고, 영화의 배경은 여성의 참정권조차 보장되지 않은 1860년대 남북 전쟁 중인 미국이다. 자기 밥조차 스스로 벌어먹을 기회 자체가 여성에게는 너무나 제한적이다.

막내 에이미는 화가가 되고 싶은데, 자신에게 성공할 만한 재능이 없다는 걸 안다. 예술계에서 성공할 가능성을 배제하자,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단이 없는 당대 여성에게 남는 선택지는 결혼뿐이다. 에이미는 부자와 결혼하고 싶은 게 창피한 거냐고 당당하게 말한다.

부자와 결혼하고 싶은게 창피한 거냐고 당당히 묻던 에이미. ⓒ소니픽쳐스코리아
부자와 결혼하고 싶은게 창피한 거냐고 당당히 묻던 에이미. ⓒ소니픽쳐스코리아

“여자는 돈 벌 방법이 없어. 생계유지나 가족 부양도 힘들어. 돈이 있더라도 결혼하는 순간 남편 소유가 돼. 그러니까 결혼이 경제적인 거래가 아니라곤 하지 마.”

에이미는 말한다. 내가 속물인 게 아니라, 여자가 결혼 아니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시대의 덫이 문제라고. 그래서 에이미는 부자 이웃 로리와 결혼한다. 다행히 사랑 없는 결혼은 아니다. 둘은 서로를 사랑하고, 결혼에 합의한다.

언뜻 보면 메그와 달리 로맨스와 현실을 둘 다 잡은 결혼 같지만 가난한 친정을 부양하기 위해 부자와 결혼하기로 한 에이미의 선택이 과연 완전히 자발적인 것일까. 에이미는 꿈을 버리고 현실과 일정 부분 타협한 것이다.

내 딸이 에이미와 같은 결혼을 한다면? 이 또한 슬플 것 같다. 쌍둥이 아들과 차별 없이 교육했는데(시킬 예정인데) 왜 경제적 자립도 버리고 꿈도 버리고 결혼하겠다는 거야? 나는 천재가 아니라는 냉철한 네 현실 인식은 존경하지만, 꼭 그렇게 결혼 제도 앞에서 무릎 꿇어야겠어?

마지막으로 실질적 주인공, 조가 남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했다. ‘이야, 이 캐릭터 정말 일관되게 강성 비혼주의자구나!’ 조의 관심은 오직 글을 써서 성공하는 것뿐이다. 그는 소울메이트 로리의 청혼을 거절하면서 말한다.  

“나는 사교계가 싫어지고 넌 내 글이 싫어져서 둘 다 불행할 거야.” 

조는 혼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사랑하고, 결혼이 그 자유를 빼앗아갈 것을 직감한다. 결혼 상대로 이보다 더 잘 통할 수는 없을 것 같은 로리일지라도 마찬가지다. 누구와 결혼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결혼 제도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

혼자 누릴 자유를 사랑하는 조, 조는 결혼이 그 자유를 빼앗아갈 것임을 안다. ⓒ소니픽쳐스코리아
혼자 누릴 자유를 사랑하는 조, 조는 결혼이 그 자유를 빼앗아갈 것임을 안다. ⓒ소니픽쳐스코리아

“여자도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과 영혼이 있고 외모만이 아니라 야심과 재능이 있어요. 여자에겐 사랑이 전부라는 말에 신물이 나요. 지긋지긋해요!” 

조의 대사는 이 시대의 비혼주의자들이 피 토하면서 말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시의성이 있다. 물론 조는 영혼의 자유를 얻는 대신 가난과 싸운다. 자기 손으로 밥 벌어 먹고사는 이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싶다는 꿈을 꾸던 조. 그 꿈을 이루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여자는 결혼해야 한다”고 주야장천 외치던 독신 고모가 물려준 유산 덕분이다. '고모도 독신이면서 왜 우리에겐 결혼을 강요하냐'고 조가 묻자, 고모는 단번에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부자잖니.”

◇ 선택은 딸의 몫, 다만 네가 원하는 걸 정확히 알고 '줄타기' 하길 

"고모는 독신이면서 왜 우리에겐 결혼을 강요하죠?" "난, 부자잖니?" ⓒ소니픽처스
"고모는 독신이면서 왜 우리에겐 결혼을 강요하죠?" "난, 부자잖니?" ⓒ소니픽처스

내 딸이 조와 같은 비혼주의자라면? 엄마보다 야무지고 똑 부러져서 감탄하는 동시에, 내가 남편과 누렸던 기쁨을 우리 딸은 누리지 못하는 게 걱정스러울 것 같다. 엄밀히 말하면 누리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내게는 기쁨이었던 것이 딸에게는 기쁨이 아니라서 결혼을 거부하는 것일 텐데도 말이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이라면 아니 그래서 딸이 도대체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겁니까, 하고 물을지 모르겠다. 음, 사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답을 정해놓는다고 제 딸이 그렇게 될 일도 아니고요.

영화에서 결혼은 경제적 거래이자 사랑의 결실이다. ‘작은 아씨들’은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각각 꿈(조), 사랑(메그), 현실(에이미)을 선택하며 ‘여자’로 성장한다. 그러니 다만 바라는 게 있다면, 내 딸이 결혼이 단순히 낭만적 사랑의 결말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히지 않기를, 자신이 뭘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그 줄타기를 하기를.

*칼럼니스트 최가을은 구 난임인, 현 남매 쌍둥이를 둔 워킹맘이다. 영화관에 갈 시간이 없어 아이들을 재우고 휴대전화로 영화를 본다. 난임 고군분투기 「결혼하면 애는 그냥 생기는 줄 알았는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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