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지만 둔한 남편이라는 함정
착하지만 둔한 남편이라는 함정
  • 칼럼니스트 최가을
  • 승인 2020.10.16 1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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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엄마의 방구석 심야 영화관] '툴리' (2018)

사람이 이렇게 안 자고도 살 수 있구나. 쌍둥이의 신생아 시절에 가장 많이 한 생각이다. 입주 도우미가 아기 한 명을 데리고 자고, 다른 아기 한 명의 밤 8시간을 4시간씩 나눠서 남편과 내가 담당했음에도 하루에 네 시간 쪽잠을 자는 날이 한 달을 넘어가자 남편도 나도 사람 꼴을 하지 못하게 됐다.

입주 도우미는 두세 시간에 한 번씩 깨서 아기 분유를 먹이면서 밤을 지새우시고, 낮에는 가사까지 도맡으셨으니 나중엔 입술이 부르트셨다. 아기 둘을 성인 셋이 맡았는데 벌어진 상황이다. 사람이 그렇게 잠을 안 자고도 살 수는 있더라. 목숨 부지는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답게 사는 건 불가능하다.

◇ 회사에서 일하고 온 남편은 신생아 육아에서 자유로워도 되나

신생아 육아만으로도 나가 떨어질 지경인데 첫째와 둘째까지 보살펴야 하는 말로. ​오죽했으면 친오빠가 만삭인 여동생에게 야간 보모 비용을 대주겠다고 제안한다. ⓒ리틀빅픽처스​
신생아 육아만으로도 나가 떨어질 지경인데 첫째와 둘째까지 보살펴야 하는 말로. ​오죽했으면 친오빠가 만삭인 여동생에게 야간 보모 비용을 대주겠다고 제안한다. ⓒ리틀빅픽처스​

영화 ‘툴리’의 주인공 말로의 상황은 우리 집보다 더 심각하다. 신생아가 막내고, 그 위로 초등학생 첫째와 발달장애가 있는 유치원생 둘째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답게 살려면 살림할 성인 한 명, 첫째와 둘째를 봐줄 성인 최소한 한 명, 신생아의 낮을 책임질 사람 한 명, 밤을 책임질 사람 한 명 총 네 명은 필요할 것 같은데 육아에 이 정도의 노동력을 조달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말로는 네 사람의 몫을 혼자 짊어지기로 한다.

이때 부자 친오빠 크렉이 야간 도우미 비용을 내주겠다고 제안한다. “인생을 ‘하청’ 줄 순 없다”라고 거절했던 말로는 아이 셋 돌보기와 살림을 도맡아서 하다가 깨끗이 항복하고 야간 도우미를 부른다. 그 도우미의 이름이 툴리.

툴리는 마법처럼 아기를 재우고, 난장판이던 집을 깔끔하게 치우고, 둘째를 위해 머핀을 굽고, 아침이면 사라진다. 툴리가 오고 나서, 말로는 생기를 되찾는다. 말로는 아이들을 돌보느라 스스로 돌보는 일을 완벽하게 망각했고, 지쳐버렸다. 그런 말로에게 툴리가 요정처럼 다가와 말한다. 

“나는 당신을 돌봐주러 왔어요.” 

누가 자신을 챙겨주는 게 어색하다는 말로는 툴리의 도움으로 비로소 ‘사람 꼴’을 하게 된다.

엄마를 위한 현대판 우렁 각시, 밤 육아의 요정 툴리. ​ⓒ리틀빅픽처스​
엄마를 위한 현대판 우렁 각시, 밤 육아의 요정 툴리. ​ⓒ리틀빅픽처스​

친오빠의 돈까지 끌어다가 돌봄 노동 인력을 한 명 추가하여 도움을 받는 동안, 말로의 남편 드루는 무엇을 하나. 그는 퇴근 후 아이들과 놀아주고, 아이들을 재우면 게임을 하다가 자기도 잔다. 막내가 깨도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런데도 영화에서 그는 충분히 착한 남편으로 그려진다. 말로도 퇴근 후 아이들과 열심히 놀아주는 남편에게 불만이 없다.

그러나 육아도 회사 일과 똑같은 노동이기에, 낮 동안 쉬지 못하고 일한 건 말로와 드루가 똑같은 상황이다. 그런데 왜 말로는 밤에 신생아를 돌보는 걸 당연한 자기 일로 생각하고 드루는 날마다 충분히 자는 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걸까.

드루의 말대로 자신은 ‘가슴이 없어서’ 모유 수유를 못 하는 거라면, 왜 드루는 게임을 할 시간에 청소하고 요리를 해두고 둘째를 위해 머핀을 구울 생각은 못 하는 걸까. 회사였다면, 같은 일을 맡은 팀원 중 한 명만 죽어라 한 달 넘게 철야 근무를 하고 다른 팀원은 날마다 정시퇴근하는 일이 가능하기나 했을까.

나는 그 이유가 드루가 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특별히 아내를 괴롭히겠다는 악의가 있거나 아내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기가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는 면죄부를 받아도 될까. 아니다. 육아라는 공동 과업을 두고 드루는 ‘내가 그 일까지는 안 해도 되지’하고 잠들었고, 말로는 ‘이 일까지도 내가 해야지’ 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 부부는 '육아 동료'… 아무리 착해도 둔한 마음은 동료애가 아니다

아, 남편이여, 그 손에 쥔 게임기를 당장 내려놓으시오. ⓒ리틀빅픽처스
아, 남편이여, 그 손에 쥔 게임기를 당장 내려놓으시오. ⓒ리틀빅픽처스

드루는 남자는, 아빠는 으레 그래도 된다는 사회에서 너그럽게 받아들여지면서 살아왔고, 말로는 여자는, 엄마는 꼭 그래야 한다는 사회에서 혹독하게 길들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별에 따라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 있다는 사실을, 강자는 모른다. 모르고 살아도 불편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둔하다는 것은 특권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다.

힘들게 일하고 온 남편이 잠 좀 자겠다는데 그놈의 잠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말하느냐고 하겠지만, 말로는 그놈의 수면 부족 때문에 건강에 큰 문제가 생긴다. 말로가 죽을 고비를 넘기는 모습을 보고 난 후에야 드렉은 당신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고 사과한다.

말로가 출산도 하기 전에 드렉이 직장에서 중요한 시기를 맞게 될 것이니 육아는 자신이 도맡겠다고 하는 모습과 대조적이다. 한쪽은 늦게까지 몰랐고, 다른 한쪽은 미리 알고 스스로를 희생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칼질하는 말로의 옆에 드렉이 다가와 함께 요리하며 영화는 끝난다. 부모는 서로에게 육아 동료다. 둔한 마음은 동료애가 아니다. 한 사람은 일하고 한 사람은 누워만 있다면, 그는 동료가 아니다. 벌떡 일어나서 상대가 짊어진 노동의 짐을 함께 지는 것, 그것이 진정한 동료다.

*칼럼니스트 최가을은 구 난임인, 현 남매 쌍둥이를 둔 워킹맘이다. 영화관에 갈 시간이 없어 아이들을 재우고 휴대전화로 영화를 본다. 난임 고군분투기 「결혼하면 애는 그냥 생기는 줄 알았는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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