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밀가루 반죽 던져도 된다고요? 왜 돼요?”
“집에서 밀가루 반죽 던져도 된다고요? 왜 돼요?”
  • 칼럼니스트 김보민
  • 승인 2020.11.02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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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에서 지구인으로 살아가기] 아이들에게 “좋아, 해보자”라고 말하는 어른 되기

지난주는 아이의 학기 중간 방학이었다. 아이에겐 미안하지만, 맞벌이 부모에게 방학은 좋은 점보다 힘든 점이 더 눈에 띄는 부담스러운 시간이다. 아이 방학에 맞춰 하루 휴가를 내어 아이와 집에서 뒹굴뒹굴하며 놀고 싶었지만, 하필 일이 마구 쏟아져 그마저도 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재택근무 중이기에 방학을 맞이한 아이와 집안에서 마주하는 시간은 길어졌고, 마음 편하게 같이 놀아주지 못해 아이에게 미안했고, 낮에 업무 집중이 안 되는 날은 야근까지 강행해서 피곤했다. 

방학을 일주일 앞두고 생각에 빠졌었다. 고작 일주일이지만 바쁜 시기여서 고민이 되었고, 뭔가 준비는 해야 했다. 마음 편히 놀고 싶어도 그럴 여유가 없어 못 만난 친구들을 초대하거나, 친구 집에 가서 노는 시간을 아이에게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이 친구 엄마 몇몇에게 메시지를 보내, 만날 수 있는 날짜를 잡기 시작했다. 

◇ 밀가루 갖고 놀아도 된단 말에 “왜 안 된다고 안 해요?”라 묻던 아이

아이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왔다. 남편이 아이들에게 밀가루를 갖고 놀라고 했다. "진짜 갖고 놀아도 돼요?"라며 아이 친구가 연신 물었다. "왜 안 된다고 안 해요?"라 묻자,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왜 안된다고 해야 해?" ⓒ김보민
아이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왔다. 남편이 아이들에게 밀가루를 갖고 놀라고 했다. "진짜 갖고 놀아도 돼요?"라며 아이 친구가 연신 물었다. "왜 안 된다고 안 해요?"라 묻자,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왜 안된다고 해야 해?" ⓒ김보민

아이가 학교 친구들과 집에 모여 놀기 시작한 건 지난 8월부터였다. 싱가포르의 2개월 자가 격리 기간이 끝나고 가정 방문이 가능한 시기가 되었을 때 아이의 학교 친구 엄마한테 메시지가 왔다. 그녀는 여름 방학이니 ‘플레이데이트’를 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플레이데이트’, 들어만 봤지 뭘 어떻게 노는 건지 감이 안 잡혀서 어떻게 하면 되는 거냐고 그녀에게 되물었다. 아이들이 노는 곳에 내가 따라가서 같이 있어야 하면 어쩌나 걱정부터 앞섰다. 버벅거리는 영어로 몇 시간이나 친구 엄마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시험을 앞둔 수험생이 가질 만한 부담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 엄마의 대답은 마음도 놓이고 마음에도 쏙 드는 내용이었다. 

“그냥 아이들끼리 놀게 두는 거예요. 집에 아이 아빠가 있어서 아이들 노는 거 봐줄 거예요. 오전에 우리 집에 아이 두고 가시고 오후에 데리러 오시면 되어요.”

플레이데이트는 거창한 게 아니었다. 그냥 ‘친구 집에 놀러 간다’ 정도인 셈이었다. 재택을 하는 나에게 플레이데이트란 구세주가 아닌가? 아이가 친구 집에 가기로 한 날은 아침부터 나도 바빴다. 

처음으로 친구 집에 초대를 받았는데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새벽부터 김밥 준비에 나섰다. 시금치를 데치고, 소고기를 볶고, 송송 썬 당근을 후루룩 볶고, 뜨거운 물에 한 번 씻은 단무지와 노릇하게 구워낸 달걀까지 넣어 김밥을 말았다. 아이는 김밥을 싸서 간다는 생각에 신이 났고, 아이가 좋아하니 나도 마음이 즐거워 부리나케 김밥을 썰어 도시락에 담아 친구 집으로 향했다. 

아이 친구 아빠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었고, 나는 아이들 점심으로 준비한 김밥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 다음 집에 돌아왔다. 아이 친구 엄마가 가끔 보내주는 아이들 노는 사진을 보면서 잘 노니 다행이다 싶었고, 한국 음식이 처음인 아이들이 김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에 뿌듯하기도 했다. 

이번 방학 ‘플레이데이트’로 우리 집에 초대한 친구는 아이와 같은 스쿨버스를 타는 열 살 언니였다. 아이들은 스쿨버스 맨 끝에 나란히 앉아 일 년 동안 학교를 오갔고, 그동안 우정이 두터워진 터였다. 아이들은 버스에서만 만나다가 집에서 만나니 더 흥분한 모양이었다. 달라진 공간과 시간에서 놀이 규칙을 찾아다녔다. 

한참 동안 둘이서 놀던 아이들이 다가와서는 ‘슬라임’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슬라임’이 뭔지 잘 모르는 나는 준비물로 뭐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물풀’이 필요하다고 했고, 우리 집엔 ‘물풀’이 없으니 ‘딱풀’을 녹이라고 했고, 아이들은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이게 사실이냐는 듯 나를 쳐다봤다. 

딱풀을 녹이는 게 부담스러웠던지 아이들은 슬라임 만들고 싶다는 말은 더 안 했다. 원하는 놀이를 못 해 방황하는 아이들에게 남편은 밀가루라도 가지고 놀라며 던져줬다. 언니인 친구가 물었다. 

“진짜 여기서 밀가루 놀이해도 돼요?”

“응!”

남편이 대답했다. 해변 모래밭에 온 모양으로 베란다 바닥에 철퍼덕 앉은 아이들은 양푼에 밀가루를 들이붓기 시작했고, 남편은 물을 부어 치대라고 했다. 언니인 친구가 물었다. 

“진짜 밀가루랑 물이랑 섞어도 돼요?”

“응!”

남편이 대답했다. 밀가루와 물을 치대는 건 쉽고 간편하다고 판단한 남편은 물감도 뿌려서 색을 만들어 보라며 옆에서 추임새를 넣었고, 얼마 남지 않은 물감을 죄다 가져와 뚜껑을 열기 시작했다. 언니인 친구가 물었다.

“진짜 여기에 물감 섞어도 돼요?”

“응!”

남편이 대답했다. 예쁘다가 희한하다가 뭔지 모를 색깔이 양푼을 수놓았다. 또다시 남편은 이것으로 놀이를 끝내기에는 아쉬운 감이 있으니 밀가루 특유의 찰진 특징을 느끼게 해주려 바닥에 힘껏 던져보라고 했다. 언니인 친구가 또 물었다.

“진짜 여기다 밀가루 반죽 던져도 돼요?”

“응!”

남편이 대답했다. 남편은 먼저 힘차게 밀가루 반죽을 베란다 바닥에 던졌고, 아이들은 신세계를 만난 듯 밀가루 반죽을 던지고 밀가루 반죽 위에서 방방 뛰며 놀았다. 밀가루 반죽 놀이에 살짝 시들해진 아이들에게 남편은 물감으로 몸에 그림을 그리라고 했고, 언니인 친구의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렸고, 남편의 팔과 티셔츠와 얼굴에 그림을 그리며 즐겁게 놀다가 물었다.

“왜 안된다는 말을 안 해요?”

남편이 대답했다.

“왜 안된다고 말해야 해?”

◇ 아이에게 재밌는 일이 왜 어른에겐 힘든 일일까? 

집에서 이렇게 놀면 안 되는 이유? 치우기 힘드니까. 그런데 해도 되는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재밌으니까! ⓒ김보민
집에서 이렇게 놀면 안 되는 이유? 치우기 힘드니까. 그런데 해도 되는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재밌으니까! ⓒ김보민

온몸에 물감을 칠하고 베란다 바닥을 온통 밀가루로 떡칠하던 아이들이 베란다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른들만큼 깔끔하게 청소하는 건 기대도 안 했으나, 아이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정리하고, 알아서들 화장실에 들어가 손과 팔에 묻은 물감을 꼼꼼하게 씻어냈다. 그리고는 한껏 밝고 경쾌한 표정이 가득한 얼굴로 다음 놀이를 하러 갔다.

아이의 친구는 태어나 처음 먹어본 콩나물국을 아주 맛있게 저녁으로 먹고 집으로 돌아갔다. 남편과 나는 저녁에 나란히 앉아 하루를 돌아봤다. 우리는 왜 뭐든 해도 된다고 했나. 우리 자신에게 되물었다. 우리가 떠올린 또 다른 질문은 이것이었다.

“이 모든 게 안 될 이유는 또 없잖아?”

사실 안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밀가루를 쏟고 물감을 들이부으면 집이 난장판이 되니까, 집이 난장판이 되면 청소하기가 힘드니까, 힘겹게 청소를 할 체력적 여유가 없으니까. 밀가루를 쏟지 않고 물감을 들이붓지 않으면 이 모든 걸 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나, 해도 되는 이유는 더 분명하다. 재미있으니까! 

생각이 여기에 닿고 보니 나를 포함해 어른이란 사람들이 아이에겐 참 사악한 인간이 아닌가 싶었다. 재미있는 일들은 모두 힘들고 지치고 귀찮은 일로 탈바꿈 시켜 못 하게 만드는 마술사 같은 사람들. 어른들은 사는 게 힘들다고 모든 놀이를 작게 만드는 묘한 능력이 있다.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놀까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수고를 적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더 멀리 더 높게 더 빨리 달려보고 뛸 수 있을지 생각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덜 움직이고, 앉아서 누워서 놀 수 있을까 생각한다. 

할 수 있는 일보다, 하면 안 되는 일을 알려주기 바쁜 어른들 얼굴은 아이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 세상 모든 심각한 일들로 늘 힘이 들어가 깊게 팬 미간과 입술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단어 ‘안 돼’, ‘하지  마’, ‘그만해’….

세상의 모든 번거로움과 귀찮음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고집스레 팔짱을 낀 모습은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원한 어른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아이들만큼 환하게 웃으며 ‘가보자’, ‘해보자’를 외치는 사람, 안 되는 것보다 되는 게 더 많은 사람, 아니 안 될 것도 한번은 해보자며 덤비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내가 원하는 어른의 모습이었다.

어른인 우리는 가끔 거울 앞에 앉아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어떤 어른이 되고 싶었어요? 지금 그런 모습으로 어른이 되었나요? 지금이라도 그런 어른의 모습을 가지려 애써 볼까요?

어른도 늘 애를 써야 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아이를 키우고 있는 우리가 먼저 잊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아이의 짧은 일주일 방학을 알차게 보냈다. 그리고 아이는 드디어 스쿨버스 맨 마지막 자리에서 언니 친구를 만나 등교를 시작했다(만세!!!!!).

*칼럼니스트 김보민은 '한국땅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산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라는 호기심으로 2년째 싱가포르에 체류 중이다. 싱가포르에 올 때 4살이던 첫째와 생후 2개월이던 둘째는 어느덧 각각 6살, 26개월로 훌쩍 자랐다. 365일 여름이고, 아시아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주로 영어를 쓰고, 작은 나라이면서도 어마어마하게 큰 아시아를 가르쳐주고 있는 싱가포르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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