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퇴근이 준 행복… 연봉보다 '시간'을 선택했다
칼퇴근이 준 행복… 연봉보다 '시간'을 선택했다
  • 칼럼니스트 이은
  • 승인 2020.11.16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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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영부영 육아 인류학] 미국에서 맞벌이 부부의 일상 찾기

미국의 대선이 끝났지만 여전히 많은 것들이 혼돈 속에 남아 있고 연일 미국의 코로나 확진자 수는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시절이 하 수상하니 믿음이 가는 오랜 인연들 말고는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쉽지가 않다.

하지만 십 년 가까운 오랜 타국 생활에 정말 친한 몇몇 사람들을 빼고는 연락이 거의 끊겨버린 지금 내가 대화를 나누는 성인이라곤 연구 지도를 해주시는 교수님들, 한국의 친정 식구들, 단조로운 미국 시골 생활 탓에 반강제적으로 최고의 단짝 친구가 돼버린 남편과 몇 안 되는 편한 친구 한두 명이 전부였다.

연봉이 몇 배나 높은 산업체 일을 하기보다 학계에 남기로 선택한 이유는… ⓒ베이비뉴스
연봉이 몇 배나 높은 산업체 일을 하기보다 학계에 남기로 선택한 이유는… ⓒ베이비뉴스

그런데 며칠 전, 연락이 뜸하던 한국의 친구가 연락을 해왔다. 오랜만에 묵혔던 수다를 풀어내고, 미국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늘어가는 뱃살과, 탄력을 잃어가는 우리 30대의 끝자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이들의 재롱 자랑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한국과의 시차 때문에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눴는데, 저질 체력임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의 즐거운 수다에 잠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이 얼마 만에 나누는, 목적도, 고정된 주제도 없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모국어 수다인가. 나름 과묵한 편이라 자부했던 나로서는 쉴 새 없이 이야기 타래를 풀어가는 내 자신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야기가 흐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육아의 고충과 워킹맘의 비애에 대한 소회와 토로들이 이어졌고,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남편과의 사이가 점점 소원해지고 있으며 다툼도 잦아지고 있다고 한숨을 쉬며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남편도 워낙 바쁜 직종이다 보니 이해는 가지만, 늘 육아는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 돼 있다는 것. 얼마 전에 새로 이직한 직장에 적응하느라 자신의 스트레스도 늘었건만 남편의 배려는 찾아볼 수 없고, 남편은 본인이 자신이 가족들을 위해서 과로를 해가면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왜 알아주지 않느냐면서 반복적으로 불만을 토로한다는 것이었다.

◇ 한국 대기업 다니던 신혼 시절… 끝내 이루지 못한 '칼퇴근'

그러면서 그녀는 한국에 있는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면서 "결혼이 원래 이런 것일까?"라는 자조적인 질문을 던졌다.

나의 삶은, 아니 우리 부부의 삶은, 아니 우리 가족의 삶은 어떤지 한번 생각해봤다. 하지만 친구의 질문은 사실 "결혼이 원래 이런 것일까"가 "한국 맞벌이 가정의 삶은 원래 이런 것일까"라는 질문과 긴밀히 맞닿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혼 때 남편은 한국에서 한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곧 퇴사를 앞둔, 패기는 넘치고 충성도는 바닥이 된 사원이었건만 그의 '칼퇴근'은 여전히 요원해보였다. 콩깍지가 씌워진 터라 내가 보고 싶다며 줄곧 탈출을 감행하던 그였건만, 그래도 일주일 내내 칼퇴근이라는 기록은 끝끝내 이뤄보지 못하고 퇴사를 했다. 야근과 새로운 프로젝트 준비는 남아 있는 그들 모두의 숙명인 것만 같았다.

미국에 온 우리 부부는 학생으로서 삶을 참 오래 이어갔다. 그 오랜 생활 동안 돈도 없고 시간도 없었지만 적어도 '내 시간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라는 유연성은 늘 존재했다.

남편이 박사후 과정 연구원이 됐을 때의 우리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돈은 없었고 시간도 없이 바빴지만, 적어도 퇴근 후 시간은 아이와 오롯이 보낼 수 있었다. 힘들었지만 가능은 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았다. 퇴근 후 시간에 여전히 연구를 하든 육아를 하든 어느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교수로 임용된 뒤의 남편은 여전히 칼퇴근을 한다. 우리는 아직도 돈도 없고 시간도 많지 않지만, 그래도 남편은 스스로 연구할 수 있는 자기 만족이 생겼다. 물론 미국도 지역 차이, 그리고 직업군 차이가 크겠지만, 개인적으로 남편의 칼퇴근은 우리 부부 사이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됐다는 것을 꼭 이야기하고 싶다.

◇ 아이들과 추억을 만들고 부부가 서로의 제일 친구가 되는 삶

이른 오후 퇴근한 남편이 작은 아이와 집 근처 숲길을 산책한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와 도란도란 아빠와 딸의 대화 소리가 어우러지는 산책길이다. ⓒ이은
이른 오후 퇴근한 남편이 작은 아이와 집 근처 숲길을 산책한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와 도란도란 아빠와 딸의 대화 소리가 어우러지는 산책길이다. ⓒ이은

남편은 보통 4시면 퇴근이 가능하다. 코로나 여파로 남편의 출퇴근 시간은 더욱 유연해졌다. 내가 몸이 안 좋거나 정말 급한 일이 있으면 남편은 시간을 조율할 수가 있다. 칼퇴근이 가능해지니,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육아 참여도 자연스러워진다. 아이들과 아빠 사이도 더 끈끈해지고 자연스럽게 애정도도 높아졌다.

나 역시 전보다 더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공부할 수 있는 시간도 좀 더 생기고, 남편과 눈 맞추고 오순도순 끝없이 이야기를 (달리 이야기를 나눌 다른 사람도 없으므로) 나눌 수도 있다. 자연스럽게 남편과 더 깊은 이야기도 나눌 수 있게 되었고, 그나마 육아 부담도 줄어드니 다툴 일이 더더욱 없어진다.

연봉이 몇 배나 높은 산업체 일을 하기보다 학계에 남기로 선택한 이유는 물론 학문적인 연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제일 크다. 하지만 또 다른 큰 이유는 애초에 이른바 워라밸(Work-Life Balance)이 가능한 삶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큰아이의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진행한 많은 저녁 행사에 어떻게 그렇게나 많은 부부들이 함께 참석할 수 있는지 늘 궁금했다. 그 모습이 참 좋아 보였고, 그렇게 살고 싶었다. 초저녁에 자연스럽게 퇴근해서 아이들과 살을 비비고 웃고 눈을 맞추고 함께 추억을 만드는 삶.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부부가 서로의 제일 친구가 돼가는 것. 그리고 그 목표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은 요즘.

한국도 많이 변하고 있다고 들었다. 참 문제도 많고 혼란스러운 미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엄마로서 살기 나쁘지 않은 이유 중에 한 가지를 대보라고 하면, 바로 이 '워라밸이 가능한 문화'라는 부분을 이야기하고 싶다. 엄마든 아빠든 퇴근하면 충분히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내일이 모두에게 있으면 참 좋겠다.

*칼럼니스트 이은은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현재는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논문작업을 하고 있다. 스스로가 좋은 엄마인지는 의구심이 들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순간순간마다 성장하는 중이라고 믿는 낙천적인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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