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라고 생각하지 마… 미리 겪은 딸의 사춘기
'소녀'라고 생각하지 마… 미리 겪은 딸의 사춘기
  • 칼럼니스트 최가을
  • 승인 2020.12.01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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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엄마의 방구석 심야 영화관] '걸후드'(2014)

까꿍놀이만 해줘도 깔깔대는 20개월 쌍둥이를 키우면서, 미리 걱정하기 선수인 나는 이 아이들이 청소년이 됐을 때를 상상한다. 그때가 되면 웃는 거 한 번 보기가 얼마나 힘들까. 지금은 내가 이 아이들의 '우주대스타'이지만, 그때는 친구가 너희들 세계의 전부가 되겠지.

아프리카계 프랑스 여성 청소년의 삶을 다룬 '걸후드'(Girlhood, 2014년)는 국적도 인종도 다르지만, 훗날 딸의 사춘기가 어떤 모습일지 그려보는 데 도움이 된 영화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여성 청소년의 사춘기는 들끓는 용암 같다. 첫 화면이 럭비를 하는 장면인데, 웅장한 음악을 배경으로 헬멧을 쓰고 일렬로 영웅처럼 등장하는 선수들을 보면서 당연히 남자 선수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격렬하게 몸을 부딪치며 운동하는 선수들은 모두 여자였다.

격렬하게 운동하고 환호하는 여성 청소년들. ⓒ㈜영화특별시SMC
격렬하게 운동하고 환호하는 여성 청소년들 ⓒ㈜영화특별시SMC

세상을 집어삼킬 듯이 기세등등했던 청소년들은 귀가하기 위해 파리 외곽의 빈민가로 진입하자 그 기세가 서서히 잦아든다. 이들을 지켜보는 남자들의 시선은 위협적이고, 빈민가 특유의 살벌한 분위기가 더해져 이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닐까 조마조마해졌다. 이들에게 세상이 결코 친절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도입부다.

주인공 마리엠은 친구들과 한 명씩 헤어지고 위태위태하게 집에 도착하는데, 마리엠에겐 바깥 세상만큼이나 집도 위험하다. 아버지의 존재는 끝까지 부재하고, 청소부로 일하는 어머니는 마리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가장 큰 문제는 폭력적인 오빠다. 그렇다고 학교가 마리엠을 보호해주나.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고 싶어하지만 성적이 모자라는 마리엠에게 학교는 직업계 고등학교에 가라고 권한다. 마리엠은 집에서는 오빠가 언제 자기를 때릴지 몰라 가슴을 졸이고, 학교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

폭력적인 오빠에게 늘 주눅 들어 있는 마리엠. ⓒ㈜영화특별시SMC
폭력적인 오빠에게 늘 주눅 들어 있는 마리엠 ⓒ㈜영화특별시SMC

갈 곳을 잃은 마리엠은 우연히 레이디, 아디아투, 필리 세 친구를 만나 소위 불량 청소년의 생활을 시작한다. 우르르 모여 거리를 쏘다니고, 모르는 사람에게서 돈을 뜯어내고, 가게에서 옷을 훔치고, 거리에서 신나게 춤을 춘다.

패싸움도 하는데, 흔히들 상상하는 ‘꺅꺅 소리지르면서 머리카락 쥐어뜯는’ 여자들의 전형적인 싸움이 아니다. 남자들의 심각한 몸싸움과 똑같은 수준으로 때리고 치고받고, 상대의 속옷을 칼로 뜯어내 전리품처럼 흔들어댄다.

넷이 똘똘 뭉치면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레이디, 아디아투, 마리엠, 필리 ⓒ㈜영화특별시SMC
넷이 똘똘 뭉치면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레이디, 아디아투, 마리엠, 필리 ⓒ㈜영화특별시SMC

이들 행동의 옳고 그름보다 영화가 더 중요하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이들의 에너지다. 영화 속 여성 청소년들은 수줍어 하지 않는다. 망설이지 않는다. 이들은 분명 사전적인 의미로 소녀인데, 소녀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연약한 이미지 때문에 이들을 소녀라고 부르기가 어색하다. 소녀는커녕 펄펄 날뛰는 야수 같다. 이들의 내면에 폭발하는 원초적인 에너지를, 가족도 받아주지 못하고 학교도 소화해내지 못한다.

늘 오빠에게 주눅 들어 지내던 마리엠은 거리 생활을 통해 강해진다. 좋아하면서도 오빠 친구라는 이유로 가까워지지 못했던 이스마엘과 사랑에 빠진다.

이 둘이 첫 섹스를 나누는 장면은, 청소년들의 성을 미화하지도 않고 대상화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섹스는 전적으로 마리엠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다. 청소년들도 충분히 성적인 주체가 될 수 있구나, 여성 청소년이 저렇게 관계를 이끌 수도 있는 거구나, 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오빠는 마리엠에게, 자기 친구랑 자다니 네가 동네 창녀냐면서 폭력을 휘두른다. 마리엠은 여동생을 자기 소유물 취급하는 오빠를 더 이상 참지 않고 집을 나온다.

연인이 되는 이스마엘과 마리엠. ⓒ㈜영화특별시SMC
연인이 되는 이스마엘과 마리엠 ⓒ㈜영화특별시SMC

폭력적 가부장 역할을 하던 오빠에게서 벗어나 바깥 세상으로 나온 마리엠을 맞는 것은 범죄 조직의 가부장이다. 마리엠은 범죄 조직의 두목 아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마약 전달책으로 일한다. 아부는 누구든 자기 지시대로 해야 한다며 마리엠에게 성적으로 접근하고, 마리엠은 이를 거부하고 조직을 뛰쳐나온다.

마리엠을 범죄 조직으로 끌어들이는 아부. ⓒ㈜영화특별시SMC
마리엠을 범죄 조직으로 끌어들이는 아부 ⓒ㈜영화특별시SMC

갈 데 없는 마리엠이 결국 찾아간 사람은 이스마엘. 이스마엘은 마리엠에게 결혼해서 함께 살자고 한다. 한국의 중년 여성 관객인 나는 화면 안으로 들어가, 청혼을 거의 받아들일 듯한 마리엠을 뜯어 말리고 싶었다. 집에서 독립하고 싶다고 성급히 결혼하는 건, 오빠라는 가부장에서 벗어나 남편이라는 가부장을 새로 맞이하는 일입니다요. 고맙다는 듯이 활짝 웃던 마리엠은 잠시 심각하게 생각한 후, 대답한다.

“결혼해서 네 애를 낳고 살라고? 그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야.”

마리엠은 야수 같은 에너지를 가진 청소년인데, 남성들이 주도권을 잡은 세계에서는 초식동물처럼 당한다. 오빠에게 맞고, 아부에게 성추행을 당한다. 그럼에도 그는 오빠와 아부라는 두 커다란 가부장의 허들을 넘고, 낭만적 사랑이라는 달콤한 가면을 썼지만 실은 가부장제의 덫이 되기 쉬운 이스마엘의 유혹을 뿌리치는 데 성공한다.

철저히 혼자가 된 마리엠. ⓒ㈜영화특별시SMC
철저히 혼자가 된 마리엠. ⓒ㈜영화특별시SMC

결말에서 마리엠은 철저히 혼자다. 남성의 폭력에서 벗어났지만, 남성의 그늘 아래 보호받을 수도 없는 벌판에 청소년 마리엠은 혼자 서 있다. 혼자 울다가 눈물을 멈추는 마리엠을 보며, 지금까지 용감한 여정을 걸으면서 쌓았을 내면의 힘이 그를 지켜주기를 기도하게 됐다.

영화를 보고 생각했다. 10년도 더 남은 일이지만, 미래에 청소년이 될 내 딸을 내 멋대로 ‘소녀’로 상정해두고 있으면 안 된다. 그애 내면에 어떤 에너지가 들끓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솔직히 보수적인 한국 양육자로서 상상도 하기 싫지만) 내 딸도 청소년기에 성적 주체가 될 수 있다.

내 딸은 여성으로서 남성 위주의 사회에 맞서 분투해야 할 것이다. 청소년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부모보다 또래 집단의 영향을 더 크게 받을 테고, 그건 때로 내 통제 범위 밖일 수 있다.

리아나의 '다이아몬드'에 맞춰 춤을 추는 네 여자들.  ⓒ㈜영화특별시SMC
리아나의 '다이아몬드'에 맞춰 춤을 추는 네 여자들 ⓒ㈜영화특별시SMC

써놓고 보니 양육자로서 한숨만 나오는 목록인 듯하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원하지 않는지를 똑바로 알고 있었던, 마리엠의 명석함을 내 딸도 지닐 수 있다면 폭풍 같은 사춘기도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칼럼니스트 최가을은 구 난임인, 현 남매 쌍둥이를 둔 워킹맘이다. 영화관에 갈 시간이 없어 아이들을 재우고 휴대전화로 영화를 본다. 난임 고군분투기 「결혼하면 애는 그냥 생기는 줄 알았는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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