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간다, 싱가포르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간다, 싱가포르에서
  • 칼럼니스트 김보민
  • 승인 2020.12.31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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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에서 지구인으로 살아가기] 싱가포르에서 보낸 2020년

며칠 전 식구들이 모여 앉아 한해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딸아이에게 물었다. 

“올 한 해 가장 잘한 일이 뭐야?”

“그림을 많이 그린 것.” 

돌아보니 아이는 어딘가 향하고 머물던 모든 길과 공간에서 끄적이고 있었다. 학교를 다녀오면 가방엔 언제나 끄적인 종이 한 뭉치가 들어앉아 있었고, 외식하러 나가는 길에도 옆구리에 작은 수첩과 색연필을 끼고 갔으니 말이다. 

아이에게 왜 이렇게 그림을 많이 그리려고 애썼냐고 물어보진 않았지만,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에 물어본 질문에 이렇게 바로 대답이 나올 정도라면 애정을 가득 담아 그림을 그렸겠구나 싶었다. 나는 질문 하나를 더 건넸다.

“올 한 해 가장 속상한 일은 뭐야?”

“한국에 못 간 것.”

아이는 코로나 시대를 관통해 살고 있다. 일 년에 한두 번 찾아오시던 할머니, 할아버지, 사촌 언니, 이모, 삼촌의 발길이 끊겼고, 그들이 사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일도 꿈 같은 일이 되어 버린 시간이었다. 한국에 있는 식구들과 영상 통화를 하고, 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 물건들이 한국에서 날아와도 아이는 온 마음으로 즐거워하지 못했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를 보며 가끔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 새는 참 좋겠어. 날아서 한국에 갈 수 있잖아.”

아직도 우리는 여름을 살아내고 있다. 동네 버스 정류장.  ⓒ김보민
아직도 우리는 여름을 살아내고 있다. 동네 버스 정류장. ⓒ김보민

나에게도 올해는 꿈 같은 시간이다. 올해 2월 베이비뉴스 필진으로 합류하면서 나름 박진감 넘치는 싱가포르 소식을 전하고자 의욕이 넘쳤다.

하지만, 4월 초 갑작스레 서킷 브레이커(Circuit Breaker)가 시작되고 2개월 넘게 집에 갇혀 지내고, 끝이 없는 재택 생활이 전개되면서 싱가포르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하겠다는 내 목표도 시간과 함께 증발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돌아보니 증발한 시간이 아니라 버티기 위해 노력한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 여섯 살의 온라인 수업, 이젠 익숙해진 재택근무

올해 4월 싱가포르 정부는 서킷 브레이커(Circuit Breaker)를 발동했고 필수 사업장과 주요 식료품점을 제외하고 모두 문을 닫았다. 학교가 문을 닫은 게 가장 충격이었고, 선생님이 매주 보내주는 시간표에 맞춰 아이는 온라인으로 수업을 들었다.

내가 아는 유일한 온라인 수업은 줄임말로 ‘인강’이라 불리는 대학 입시생들을 위한 인터넷 강의가 전부였고, 아이가 온라인 수업을 들을 때마다 마우스로 커서를 움직여줘야 했기에 나란히 앉아 같이 수업을 들었다. 친구들 모습이 노트북 화면에 등장하면 아이는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선생님의 이야기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럴 때마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나는 손짓 발짓으로 선생님 이야기를 들으라고 무언의 주문을 했고, 그런 나를 보고 아이는 친구들에게 ‘우리 엄마 화면에 안 보이지만 내 옆에 앉아 있어’라고 큰 소리로 떠들었다. 아이는 손가락 근육을 잘도 써서 마우스로 커서를 잘 움직이게 할 수 있고, 인터넷을 사용하려면 어떤 버튼을 눌러야 하는 지도 알게 되었다. 

한편, 컴퓨터 프로그래머 또는 디자이너에게나 가능할 것 같은 재택근무를 나도 해야만 했다. 처음 한 달은 재택이 길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거실에 있는 식탁에 임시 사무실을 마련했다.

온라인 수업을 하는 아이를 포함해 온 식구가 식탁에 모여 앉아 일을 하고, 공부를 하고, 밥을 먹고, 간식을 먹으며 종일 보내다 잘 때가 되어서야 방으로 들어가는 수준이었다. 식탁 생활 2개월이 될 무렵 재택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 아이의 놀이방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책상을 꺼내 안방으로 옮겨와 조금 업그레이드된 버전의 임시 사무실을 꾸몄다.

그곳에서 6개월이 넘게 남편과 나란히 앉아 일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지금은 이 생활에 익숙해졌고 매일 출퇴근을 했던 내 모습이 이젠 떠오르지 않는다. 

◇ 재난 앞에서 외국인 신분은 바람 앞의 등불

싱가포르의 관광 산업은 코로나 초기에 직격타를 맞았다. 여행객을 실어 나르던 비행기가 공항에 앉아 쉬고 있는 동안 크고 작은 호텔에서는 사람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호텔리어로 근무중인 한국 사람들 중 직장을 잃고 귀국한 이들도 많았고, 비즈니스 축소와 안전을 이유로 한국으로 돌아간 이들도 많았다.

싱가포르의 서킷 브레이커(Circuit Breaker) 기간 전에 싱가포르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 외국인들 이야기는 숱하게 들었고, 싱가포르 정부에서 워킹 비자가 잘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한동안 계속 들었다. 나도 워킹 비자를 연장해야 하는 시점이 왔고, 2번이나 거절이 된 바람이 혼이 쏙 빠진 시기가 있었다.

내 발로 찾아와 일을 하고 생활하는 곳이 싱가포르이지만 세계적인 재난 앞에서 외국인 신분은 바람 앞의 등불만큼 위태로워 보였다. 가족들과 모두 하는 해외 생활은 처음이라 행여라도 누구 하나 아플까봐, 생각하지 않은 경제적 상황을 맞이할까봐 마음 졸였던 시간이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경계인의 영역에서 큰 난관에 봉착하지 않으려 부단히 애쓰고 있다. 

◇ 집에서 일하고, 먹고, 춤추며 살아간다 

남편을 빼고 만 2세, 만 6세 어린이들과 나는 집에서 노는 것을 싫어한다. 주말이 오면 무조건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 하고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밤이 찾아오는 늦은 시간 집에 들어와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누워야 하는 사람들이다.

해가 떠 있을 때 집에 가자고 하면 아이들이 울고 불며 아주 난리가 날 정도이니 아프지 않으면 나가야 한다. 사실 가는 곳은 그리 다양하지 않다. 한 달에 4번은 갤러리를 가고, 늘 보는 마리나베이 호텔을 보고, 즐겨가는 동네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늘 가는 식당에서 외식을 하는 게 전부였다.

이런 사람들이 올해 대부분을 집에서 놀았다. 배달오는 박스로 집과 자동차를 만들었고, 비가 오면 아파트 단지에서 비를 맞고 놀았다. 우리는 모두 춤꾼이 되었고, 요리사가 되었고, 식탁과 의자, 이불과 베개 집짓기 달인이 되었다. 

◇ 코로나로 집 주인 파산, 연말인데 쫓기듯 이사 준비

집 에이전트가 갑자기 연락을 해서는 2달의 시간을 줄 터이니 집을 비워 달라고 했다. 집주인이 코로나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파산을 했고 집이 은행으로 넘어갔다는 설명을 들었다.

12월 크리스마스와 연말 휴가를 앞두고 무슨 일인가 싶었다. 집주인의 파산이 우리 일상에 영향을 준 것도, 코로나의 여파가 집주인의 경제 상황에 영향을 준 것도 어디 책에서나 나오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소식을 듣고 그다음 날까지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 애를 썼고, 마음의 정리를 하고 남편과 곧바로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아이들 학교, 출퇴근 거리, 경제적 상황, 선호하는 지역 등 집을 고를 때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 한둘이 아닌 데 이것을 모두 고려하고 딱 맞는 집을 찾을 여유가 없었고, 급하게 집을 찾느라 힘이 더 드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몇 가지 고려사항 중 두어가지를 포기하고 마음에 드는 집을 일주일 만에 찾아 계약했다. 정든 동네와 집을 도망치듯 떠나는 듯해 섭섭한 마음도 컸지만, 한편으로는 코로나로 힘들었을 집주인도 잘 극복하고 다시 일상으로 잘 복귀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 코로나 시대, 그래도 많이 잃지 않은 일상에 감사하며

큰아이의 발레복을 둘째 녀석 슈퍼맨 옷으로 만들어줬다. 아이는 교복처럼 매일 이 옷을 입고 논다. ⓒ김보민
큰아이의 발레복을 둘째 녀석 슈퍼맨 옷으로 만들어줬다. 아이는 교복처럼 매일 이 옷을 입고 논다. ⓒ김보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싱가포르에서 잘 지내고 있다. 아이들은 일 년 내내 마스크를 잘 쓰고 다니고, 식구들 모두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다. 아직 회사에 적을 두고 한 달에 한 번 월급을 받고 있어 경제적으로도 괜찮다.

사실 이렇게 보면 코로나 시대에 많은 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셈이다. 그래서 코로나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 많아졌다고 구시렁대지 않으려고 한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다.

예상하지 않은 팬데믹으로 직장을 잃고, 돌봄의 공백으로 에너지를 잃고, 마음의 우울함이 커진 이들에게 같이 잘 버텨보자는 긍정의 에너지를 주고 싶다.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함께 하자는 마음의 응원도 보내고 싶다.

그래서 언젠가 코로나가 종료될 때, 마치 세상을 다시 얻은 듯 사람들과 부등켜 안고 다 같이 기뻐하고 싶다. 올해는 계획대로 이뤄진 게 없었지만, 내년 계획 하나 조심스레 세워본다. 내년에는 꼭 좋아하는 이들을 모두 다시 만나 소리 내어 웃어보고 싶다. 

2020년 한 해 동안 「싱가포르에서 지구인으로 살아가기」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내년에도 생활과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로 찾아갈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칼럼니스트 김보민은 '한국땅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산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라는 호기심으로 2년째 싱가포르에 체류 중이다. 싱가포르에 올 때 4살이던 첫째와 생후 2개월이던 둘째는 어느덧 각각 6살, 26개월로 훌쩍 자랐다. 365일 여름이고, 아시아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주로 영어를 쓰고, 작은 나라이면서도 어마어마하게 큰 아시아를 가르쳐주고 있는 싱가포르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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