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로 떠나간 제자들,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들과의 추억
하늘나라로 떠나간 제자들,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들과의 추억
  • 칼럼니스트 박현주
  • 승인 2021.02.02 11: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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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꿈을 꾸는 아이] 하루하루를 감사함으로 채워주는 아이들

차량운전을 하다가 한 아파트 모퉁이를 지나간다. 떠오르는 아이가 있지만, 애써 외면해본다. 운전하다 낮은 굴다리 옆 순대국밥집을 지나간다. 생각나는 반짝이는 이들이 있지만 꺼내어보기엔, 밝고 밝은 빛이 마음을 아리게 해 쉽게 꺼낼 수 없는 아이들이 있다. 나에게는 그런 아이들이 있다. 성공한 사람이건, 그렇지 못한 사람이건 이 세상에 의미없는 이는 없는 듯하다.

현장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수많은 선생님들, 평범하지 않은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 하루하루 서로를 품에 안고 사랑하고 사랑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그저 살아가고 있다. ⓒ베이비뉴스
현장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수많은 선생님들, 평범하지 않은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 하루하루 서로를 품에 안고 사랑하고 사랑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그저 살아가고 있다. ⓒ베이비뉴스

◇ 내 스승이었던 일곱 살 아이와의 만남, 그리고 이별

특수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아이는 여섯 살이었다. 사슴처럼 맑고 깊은 눈, 나는 처음 아이를 보았을 때 그 맑은 눈에 금방 매료되고 말았다. 하지만 아이의 몸을 봤을 때는 어떻게 해줘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여섯 살에 고작 6kg 될까 말까. 신생아의 평균 몸무게가 3.2kg인 것을 기억해보면 이 아이가 얼마나 왜소하고 말랐는지 짐작할 수 있다.

어느 가난한 나라의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마냥 허벅지는 내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잡으면 한 손에 잡히는 정도. 아이의 이전 선생님은 이 아이의 목표를 '잘 먹이기'로 잡았다 했다. 아침에 등교할 때부터 보조선생님의 곁에서 아침, 점심, 간식을 차례대로 먹고 하교를 하곤 했다. 아이는 밥과 반찬을 갈아 죽의 형태로 만든 다음 갈아서 먹였다. 체력이 워낙 약했기 때문이었겠지만 아이는 자주 아팠다. 감기 같은 질환을 항상 앓고 있었다. 그래서 늘 식사시간에 실컷 먹여놓아도 잦은 기침에 사래가 걸려 게워내기 일쑤였고, 그러면 다시 보조 선생님은 새 밥을 준비해 먹이고 또 먹여야만했다.

아이는 3개월이면 가눈다는 목 하나 스스로 가누기 어려운 아이였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의사표현이나 참여가 가능한 수업은 거의 없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이는, 아이의 음식을 챙겨 들고 걸어오는 보조 선생님의 신발소리가 들리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맛을 쩝쩝 다셨다. 내가 인수받은 아이에 대한 정보는 이 정도였다. 이 아이가 새내기 선생님인 우리 반이 됐다. 부서질까, 아플까 늘 조심조심 해야 했지만, 열정 넘치는 선생님이었던 나는, 아이를 한시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미숙함 투성이의 선생님이었으니, 어떻게 해서건 수업에 참여시켜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던 시간들이 있었다.

학급의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실내 놀이터 같은 곳을 가면, 이 부서질 것 같은 아이를 트램펄린에 눕혀놓고 살살 흔들어 줬다. 그때마다 아이는 놀란 토끼눈이 돼서는 "오오오오~~" 소리를 내곤 했다. 그 순간에도 나머지 4명의 아이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부서질까 조심조심하는 내 마음도 모른 채 마음대로 걸을 수 있는 나머지 자유로운 아이들은 어느새 선생님 곁으로 다가와 친구의 불편함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높이 힘껏 뛰기 시작한다. 아이들에게 하지 말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라, "하하하하..." 아이가 웃는다. 누워서 제 목하나 가누지 못하는 맑은 눈을 가진 이 아이가 소리 내어 웃는다.

처음 보고 처음 들었다. 아이의 웃음소리. 그때 나는 처음 알았다.

‘아, 너도 여섯 살 어린아이구나.’

이후로 나는 아이를 데리고 모든 교육과정에 동등하게 참여 시키려고 애를 썼다. 바깥놀이도 함께 했고, 산책도 주저하지 않았으며, '나의 몸'을 배우던 수업시간에는 아이의 뻣뻣하게 굳어가는 팔을 오랜 시간 마사지를 해 부드럽게 만든 다음 제 머리카락을 만져보게 했다. 아이는 다시 놀란 눈과 입술로 "오오오오~" 소리를 내었다. 세상에 이런 촉감은 처음 만져본다는 듯.. 아마 아이도 처음이었을 테다. 잘 움직이지 않는 팔, 제 몸을 스스로 만져본 적이 없을듯했다. 아이는 나의 과도한 참여요구에 때로는 울기도 했고, 때로는 "오오오" 소리를 내며 신기함을 표현하기도 했으며, 아주 가끔은 '하. 하. 하.' 특유의 어설픈 웃음소리로 나를 기쁘게 해줬다. 

주는 대로 먹는 줄만 알았던 아이가 먹던 반찬과 밥을 모두 갈아 만든 유동식을 쳐다보며, '이게 너에게도 맛이 있을까...' 인간적인 고민을 한 날 부터 아주 번거롭긴 했지만, 밥과 반찬, 그리고 국을 모두 따로 갈아 준비해 아이에게 먹였다. "오오오오~" 밥을 얌전히 받아먹기만 하던 녀석이 나에게 말을 건다. '선생님 이건 무슨 맛이에요?'라고 되묻듯이. 며칠 지나자, 이 아이도 편식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귀신같이 김치 갈은 것은 있는 힘껏 밀어내려고 애를 썼고 고기류는 쩝쩝 입맛을 다시며 더 달라고 요구하는 듯 했다.

‘아, 너도 편식이 있는,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그냥그냥 아이였었구나.’

이렇듯 아이는 부족한 나를 아이 눈에서 생각하는 선생님으로 키워 나갔고, 아이를 통해 아이 안에 있는 '사람'을 보는 연습을 시켰다. 내 스승이었던 이 아이는 일곱 살, 스승의 날을 며칠 앞두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짧은 생이었다. 미안하고 아팠다. 나의 첫 제자의 죽음이었다.

◇ 하늘나라로 떠나간 또 다른 아이

다섯 살 아이, 나는 다른 한 아이의 첫, 선생님이 됐다. 포동 말랑한 아이의 볼이 너무 너무 좋았다. 살짝 쳐진 눈꼬리에서 아기 냄새가 풋풋하게 날 때면 꼭 끌어안고 놓아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이의 품이 나는 좋았다.

아이는 걷기는 했지만 조절과 협응이 쉽지 않아 이리쿵저리쿵 부딪히기 일쑤였다. 계단 같은 곳에서 공간감각 지각이 어려워 계단도 평지 걷듯 걸어 구르기 십상이었다. 아이는 손을 꼭 손을 잡고 다녀야 다치지 않았지만 다섯 명의 아이를 한명의 교사가 돌보면서 상처가 나지 않게 돌보는 일은 늘 어려웠다. 집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아 아이의 팔다리는 늘 크고 작은 멍이 있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나에게 늘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씀해주셨다. 감사한 일이었다.

배시시 웃으면서 나를 보고 걸어온다. 안기는 품을 좋아했고, 포크 숟가락 하나 스스로 쥐고 먹기 어려웠지만 늘 입을 크게 벌리며 자기를 먹여달라고 몸으로 먼저 이야기하곤 했다. 오물거리고 먹는 그 모습이, 세상 행복한 그 아이의 모습이 나는 마냥 예뻤다. 뛰고 나르는 다른 아이들 때문에 기운이 쪽 빠지더라도, 포동한 아이를 한번 꼭 끌어안아주고 나면 다시 힘이 나는 느낌이었다.

아이는 미안하게도, 내가 담임이던 날들도 그다지 많은 성장을 보이지 못했다. 물건을 쥐는 것이나, 말하기, 장애물 피하기 등 아이가 배워야 할 많은 과제들이 있었지만, 나름 최선을 다해 지도했다고 생각했으나 아이는 내 기대에 못 미치게 성장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을 테다. 아이는 제 속도로 나름 최선을 다해 성장하고 있었을 테니까.

아이의 학년이 바뀌어 아이는 여섯 살이 됐고, 나는 그해 학교를 그만뒀다. 아이의 소문은 간간히 들었지만 경기 한 번에 아이가 다시 걷지 못한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나도 어린이집을 개원하고 비슷한 아이들을 키워내느라 잊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가끔 포동하고 눈이 쳐진 귀여운 아이가 들어올 때면, '아, 내 아이도 저런 아이가 있었는데.' 회상하는 정도였다.

운전을 하고 지나가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아이의 엄마였다. 목소리를 듣고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잊을 수 없는 내 아이였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내가 아이의 안부를 묻자, 하늘나라로 갔다는 말을 전했다. 말을 전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점점 울음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아이의 가장 예뻤던 순간을 함께 한, 선생님. 어머니가 나에게 전화를 한 계기였다. 아이가 사무치게 그리운 날은, 아이와 추억을 곱씹으며 공감의 접점에 있는 내가 생각났다 했다. 어머니가 기억하는 아이의 첫 선생님, 나는 그랬다.

나 역시 그랬다. 가장 열정적인 날, 만난 가장 사랑스러웠던 아이. 내 아이. 아이의 속도대로 내가 무릎을 낮추고 눈을 낮추고 가만히 기다려주는 것만으로도, 지지의 눈빛으로 기다려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늘 행복해 했다. 어쩌면 내가 한동안 느꼈던 미안함, 아이에게 큰 성장을, 많은 것을 가르쳐주지 못했다는 자책은 아이에게 필요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마운 아이, 미안한 아이. 그 아이 역시 원인모를 퇴행으로 섭식도 걷기도 점점 되지 않아 병원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했다.

한 번만 그 오물거리는 입을, 포동한 손을 잡아 보았으면 좋으련만... 아마도 부모는 매일을 오늘의 나같이 아파했을 테다. 사랑하는 아이를 만질 수 없는 그리움을 품고 그렇게 살아왔을 테다. 나는 한없이 미안했고, 미안했다. 아이가 힘든 순간에 함께 하지 못함이 마음에 남았다. 그 손 한번 잡아줄 여유가 없이 바쁘게 살았던 내가 미웠다.

며칠 전 근이양증을 가진 장애인을 돌보는 어머니의 페북을 보고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의사들이 일곱 살까지 밖에 못산다, 열네 살까지 밖에 못산다, 하는 말을 전적으로 믿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어머니의 자녀는 스무 살이 훌쩍 넘은 성인기였다.

어린이집 차량을 운전하고 항상 지나는 그 아파트. 그 아파트에 또 다른 내 아이가 살고 있었다. 아이는 근이양증을 갖고 있었다. 같은 병명을 가졌던 아이의 형은 일곱 살에 하늘나라로 갔다고 했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일곱 살이 되던 해 부터 몹시 불안해했다.

아이를 보고 우는 날이 많아졌다. 전화가 오면 어머니는 몹시 불안해했고, 그 불안을 쏟아 내느라 쉽게 전화를 끊기 어려웠다. 어머니의 우울증이 깊어졌다. 일곱 살을 맞이한 이 아이의 죽음을 늘 예견하듯 불안의 깊이는 점점 더해져갔다. 어린이집을 잘 보내지 않았다. 지금에야 고백하건데, 나 역시 겁쟁이였다. 형이 그 무렵 하늘나라로 갔다는 사실 때문에 나 역시 가슴을 졸이며, 아이가 낮잠을 자는 순간에도 늘 숨은 쉬고 있는지 콩닥대는 가슴으로 아이의 생사를 확인하곤 했다. 어머니의 우울이 극에 달한 어느 날 부턴가 아이는 등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를 보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부모의 불안과 나의 불안은 같았을 테다.

어린이집 운영이 한참 힘들었던 날, 아이의 엄마가 한참어린 나에게, 어린 원장에게 이야기했다.

"원장님, 내 동생 같으면 장애아이들 가르치는 거 하지 말라 그랬을 것 같아요. 왜 이렇게 많이 배우고, 이렇게 잘났는데 이런 애들 데리고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사실 이 말을 듣는 순간, 이 어머니는 학부모의 관계를 넘어 내 언니, 부모같이 느껴졌다. 지체장애를 가진 내 아버지가 내가 특수교육과를 간다고 했을 때 했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 안에, 고마움이, 애달픔이, 미안함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말이었음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아이가 퇴소하고 나서 선뜻 잘 지내고 있는지 연락을 하지 못했다. 간간히 과거를 추억하는 선생님들과 '잘 지내고 있을까? 벌써 하늘나라 갔겠지? 전화 했다가 또 하늘나라 갔다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해.' 스스로 두려움에 마음을 닫고 지내왔다. 아이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간의 사는 이야기를 들으며 언제든 차 한 잔 마시고 싶은 언니 같은, 때론 부모 같은 학부모였는데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 내가, 많은 이들이 기억해주길 바라는 것은?

여전히 발달장애인의 수명은 비장애인보다, 다른 장애인들보다 짧다. 성공한 장애인, 또는 수용해야할 장애인, 여러 장애인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 짧은 생을 잠깐 반짝이고 사라지는 아이들이다. 세상에는 이런 반짝이는 아이들도 있음을 모르고 지나감이 너무나 미안하고 아쉽다. 

나에게 삶은 길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루하루를 얼마나 보석처럼 소중하게 여기며 사는지에 대한 문제라고 이야기해주는 고마운 아이들이다. 재미있는, 즐거운 하루하루, 매일이 모여 행복한 삶이 돼 줄 테니, 최선을 다해 살라고 최선을 다해 가르치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라고 말해주는 내 아이들이다.    

하루하루를 감사함으로 채워주는 내 아이들이다. 많은 이들이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현장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수많은 선생님들, 평범하지 않은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 하루하루 서로를 품에 안고 사랑하고 사랑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그저 살아가는 것, 아이들을 바라보고 눈을 맞추고 손을 맞잡아주는 것, 평범한 일상을 감사로 채워나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거라고. 

*칼럼니스트 박현주는 유아특수교육을 전공해 특수학교에서 근무했다. 결혼과 출산을 겪으면서, 내 아이를 함께 키우고 싶어 어린이집을 운영하게 됐다. 화성시에서 장애통합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부모님들과 함께 꿈고래놀이터부모협동조합을 설립하는 데 동참해, 현재 꿈고래놀이터부모협동조합에서 장애영유아 발달상담도 함께 하고 있다. 다양한 아이들을 키우는 일, 육아에서 시작해 아이들의 삶까지, 긴 호흡으로 함께 걸음으로 서로의 고민을 풀어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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