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6세 어린이, 원피스를 입지 않겠다 결심하다
만 6세 어린이, 원피스를 입지 않겠다 결심하다
  • 칼럼니스트 김보민
  • 승인 2021.02.15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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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에서 지구인으로 살아가기] 즐거움을 만끽하며 사는 것이란?

사시사철 더운 날씨로 시간이 흐르는 지, 멈췄는지 알려고 덤비지 않으면 날짜 정도는 잊고 살 수 있는 곳에 살고 있는데다가 코로나로 인해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시간에 대해 더 무디어졌다. 매정한 시간은 멈춰버린 우리 현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코 흘러갔다. 이제서야 지난 해 12월에 멈춘 달력을 버리고, 더 없이 진한 잉크가 찍힌 2021년 달력을 책상위에 펼쳐뒀다. 새해가 됐다고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보던 순간이 있긴 했는데 어느 순간 돌아보던 일을 멈췄다.

지금 당장 온 식구 무탈하게 일상생활 영위하고 살고 있으면 잘 살아왔다는 뜻일 테고 굳이 지구인 모두가 겪는 대재앙 앞에서 뭐가 부족했고, 아쉬웠는지 자책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자책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이다. 이 상황은 언제 끝날지 모르니 나와 가족의 건강을 챙기고, 멀리 있는 식구들과 친구들, 주변에 마음을 나누고 사는 지인들에게 좋은 기운 나누며 새로운 일상을 영위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라는 마음으로 살아나가겠다고 다짐하는 정도가 새로운 시간 앞에서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의지 아닐까? 

새해는 밝았으니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아이들 옷을 정리했다. 사실 옷 정리도 굳이 할 필요가 없긴 하다. 흐르는 시간이 모두 더운 여름이라 계절 맞춰 옷을 꺼내고 세탁해 보관할 필요도 없다. 옷이 조금 작아지거나 너무 자주 빨아 옷이 해지면 새 옷으로 바꿔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옷을 정리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느 날부터 큰 아이가 원피스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만 6세가 된 큰 아이는 지난해 9월부터 원피스를 입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학년이 바뀔 때 작아진 교복을 바꿔야할 것 같아 교복을 사러 간 날이었다. 여학생들은 원피스 한 벌, 치마바지와 티셔츠 세트 또는 바지와 티셔츠 세트, 체육복 세트를 골고루 준비하고 번갈아 가며 입는다. 아이는 교복을 둘러보더니 바지와 티셔츠 세트와 체육복 세트면 충분하다며 대신 바지와 티셔츠 세트는 여유 있게 사달라고 주문했다. 뭔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에 원피스나 치마바지는 없어도 되겠냐고 재차 물어봤다. 아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엄마, 난 이제 원피스는 안 입을 거야. 원피스 잠옷은 입지만 놀이터 갈 때, 밖에 놀러 나갈 때, 학교 갈 때 바지만 입을 거야.”

집에서나 밖에서나 한결 같은 바지 사랑:). ⓒ김보민
집에서나 밖에서나 한결 같은 바지 사랑:). ⓒ김보민

아이의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의 힘에 떠밀리듯 알겠다고 우물쭈물 대답하며 바지와 티셔츠 세트 2개와 체육복 세트만 사서 들고 나온 날이었다. 그렇게 6개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가 한 일은 딱 한가지, 아이가 놀이터갈 때, 피아노 학원 갈 때, 주말에 놀러 나갈 때, 친구 집에 갈 때 뭘 입고 나가는 지 관찰하는 일이었다. 사촌 언니한테 물려받은 수건 재질의 줄무늬 바지와 배꼽을 살짝 덮을 정도로 길이가 약간 짧은 스포츠 티셔츠는 단골 중 단골이었다. 청 반바지와 흰 바탕에 미키 마우스가 그려진 티셔츠, 보라색 체크무늬 바지와 진한 파란색 민소매 티셔츠는 세상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양말 취향도 참 독특했다.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오는 양말을 신고 나가긴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복숭아뼈까지 돌돌 말아 내려 보통 양말 길이에 맞췄다. 양말을 그렇게 신는 이유는 이후에 따로 물어봤는데 묘하게 설득력은 있었다.

“무릎까지 오는 양말이 마음에 들어서 신긴 하는데, 좀 오래 걷다 보면 더워. 싱가포르는 원래 덥잖아?”

해가 바뀐 어느 날 아이의 숙제를 봐주다 진지하게 물어봤다.

“넌 앞으로 정말 원피스는 안 입을 거야?”

“응, 난 원피스는 안 입을 거야.”

“왜 안 입을 거야?”

“왜냐하면 불편해. 달리기할 때 다리를 마음껏 뻗어서 달릴 수가 없어. 왜냐하면 팬티가 보일 까봐 걱정이 돼서. 난 바닥에 앉아서 애들이랑 노는 걸 엄청 좋아하는데 바닥에 앉을 때 편하게 앉을 수가 없어. 왜냐하면 팬티가 보이면 안되니까. 그래서 원피스는 잘 때만 입을 거야. 그때는 걱정이 없거든.”

이 정도로 본인의 생각을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아이에게 그래도 원피스가 예쁘니까 가끔 입어보지 않겠냐고 물어본다든가 네가 원피스를 입으면 더 멋져 보인다는 이야기는 건넬 필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넌 편하게 더 재밌게 노는 게 좋은 거구나? 지금 있는 원피스를 당분간 안 입으면 점점 작아져서 아예 못 입는 날이 올 수도 있는데 원피스 좋아하는 친구들한테 나눠줘도 돼?”

“응, 내 원피스 친구들 줘도 돼. 난 지금은 원피스를 입지 않을 거고, 앞으로는 잘 모르겠어. 다시 원피스를 입고 싶어지면, 그 때 다시 입지 뭐.”

그리해 난 새해를 핑계 삼아 아이의 옷장을 정리했다. 원피스를 하나하나 펼치며 아이에게 한 번 더 의견을 물어봤고, 커다란 종이가방에 원피스가 차곡차곡 쌓였다. 꽉 찼던 아이의 옷장에 숨통이 트였고, 아이가 좋아하는 바지와 티셔츠를 아이 손이 닿기 쉬운 두 번째 서랍에 나란히 줄 맞춰 정리했다. 이후 아이는 더 빠른 속도로 명쾌한 몸동작으로 좋아하는 옷을 골라 씩씩하게 입고는 놀이터를 향해 달려갔다. 좋아하는 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백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놀이터를 향해 달리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는 제 스스로 자신의 취향을 찾고, 더 큰 만족감을 누리는 방법까지 터득했으니까.

어린이의 즐거움을 카메라에 담을 수 없을 때가 더 많다. ⓒ김보민
어린이의 즐거움을 카메라에 담을 수 없을 때가 더 많다. ⓒ김보민

어른들도 각자의 만족감을 위해 노력하고 산다. 생산성, 기회비용, 가성비 같은 단어로 그 가치를 측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속옷이 보이는 것과 같은 극도의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원피스를 입지 않는 것과 같은 특단의 조치를 내리기는 어른들에게는 힘들어 보인다. 오롯이 즐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남에게 어떻게 비춰질 지 고민도 해야 하고, 이왕이면 이쁘게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불편함을 감수하기도 하고, 급기야 즐거움이 뭔지 잘 모르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본인이 누리고 싶은 즐거움 앞에서 모든 장애물을 걷어치우고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스스로 조성해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 사실 어린이들이 제일 잘하고 어른이 본받아야 하는 요소가 아닐까? 

원피스를 정말 사랑하는 아이가 곁에 있다면 한번 물어보고 싶다. 그 아이는 우리 아이와는 다른 세상을 꿈꾸고, 온 마음으로 그 세상을 즐기는 어린이일 것이다. 원피스를 좋아하는 어린이도, 원피스를 싫어하는 어린이도 본인의 취향을 어른들에게 존중 받을 필요가 있다. 거기서부터 하나의 취향과 개성은 즐거움과 만족감을 만나 그 사람만 가질 수 있는 성격과 특징이 무지갯빛처럼 오색찬란하게 진해지면서 멋진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 테니까.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우리 집 어린이는 다시 원피스를 입고 싶어 할까? 아니면 한동안 계속 바지와 티셔츠를 고집할까? 다시 원피스를 입고 싶어 하면 그땐 또 어떤 이유로 다시 원피스를 입게 될까? 그리고 그땐 어떤 생각과 상상을 하는 사람으로 자라 있을까?

*칼럼니스트 김보민은 '한국땅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산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라는 호기심으로 2년째 싱가포르에 체류 중이다. 싱가포르에 올 때 4살이던 첫째와 생후 2개월이던 둘째는 어느덧 각각 6살, 26개월로 훌쩍 자랐다. 365일 여름이고, 아시아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주로 영어를 쓰고, 작은 나라이면서도 어마어마하게 큰 아시아를 가르쳐주고 있는 싱가포르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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