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나의 시선 밖에서 더 많이 자란다
아이들은 나의 시선 밖에서 더 많이 자란다
  • 칼럼니스트 김보민
  • 승인 2021.02.25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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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에서 지구인으로 살아가기] 아이와 함께 보내는 주말

토요일 아침 우리집 풍경은 항상 일정하다. 아이들은 눈을 뜨자 마자 침대로 달려와 EBS를 틀어 달라고 조른다. 이사를 하면서 TV를 안방으로 옮겼고, 토요일 오전 1시간 동안 아이들이 마음 놓고 TV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만화를 보고 아침밥을 먹고 큰 아이는 학교에서 특별활동처럼 진행되는 스포츠 수업에 가기 위해 아빠와 집을 나선다. 나도 서둘러 운동복을 챙겨 입고 둘째와 밖으로 나간다. 자전거 타기에 흠뻑 빠져 있는 둘째와 토요일 아침마다 동네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다. 

토요일 아침 신나는 자전거 여행! ⓒ김보민
토요일 아침 신나는 자전거 여행! ⓒ김보민

이사 온 새로운 동네에서 발견한 첫 번째 즐거움은 바로 산책로! 아파트 외부에 산책로가 조성돼 있는데 끝까지 걸어가면 동네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에 다다른다. 오전 9시 적도의 햇살을 온 몸으로 받으며 자전거 페달을 밟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달리면 하늘로 날아갈 듯 기쁘다. 피부가 따끔거릴 만큼 쨍한 햇살, 커다란 나뭇가지도 뒤흔드는 바람, 아이의 웃음 소리, 가볍게 땅을 박차고 나갈 때 느껴지는 내 몸의 에너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다. 

산책로를 두어 번 달려본 아이는 이제 어느 시점에서 무엇을 봐야 하는 지도 안다. 길 왼쪽에 있는 주택에는 커다란 새장이 있다. 아이는 달리는 속도를 줄여 새들과 인사를 나누고, 새들이 모이를 먹는 모습, 물을 마시는 모습 포르르 날아 횃대에 오르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본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왜 새들이 하늘로 날아가지 않고 집에만 있어?”

나는 새장에 갇혀 사는 새들이라 대답해주기 싫어서 토요일이라 집에서 쉰다고만 하고 산책로로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햇살이 쨍한 산책로와 오도카니 서 있는 아이의 자전거. ⓒ김보민
햇살이 쨍한 산책로와 오도카니 서 있는 아이의 자전거. ⓒ김보민

한참 산책로를 달리다 보면 갈림길이 나온다. 둔덕 아래는 자전거 전용 길이고, 위는 사람이 다니는 길이다. 아이는 둔덕 윗길로 올라가 조금 달리다 다시 아래 길로 내려가는 여정을 좋아한다. 둔덕 위로 오르려 낑낑거리며 페달을 밟는 아이의 자전거를 살짝 밀어주면 언제 힘들었냐는 듯 아이는 이내 내달리기 시작한다. 짧은 내리막길을 이용해 둔덕 아래 길로 향할 때에는 자전거에서 내려 제 몸만큼 큰 자전거를 조심조심 끌어내린다. 편평한 길에 이르면 기수가 말 등에 사뿐히 오르듯 자전거 안장에 올라탄다. 그리고 우리 둘은 한참 동안 햇살과 바람과 커다란 나무 아래를 달리고 또 달린다. 

토요일 아침은 강아지들도 산책하기 좋은 시간인지 안면이 있는 동네 강아지 친구들을 만난다. 강아지라고 하기에는 덩치가 곰처럼 큰 개 친구들도 가끔 곁을 지나가는데 그럴 때면 아이와 나는 몸을 살짝 움찔하기도 한다. 자전거 페달을 휘휘 밟는 아이는 지나가는 개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개 목줄을 잡고 뒤따라가는 어른들과도 찡긋 눈인사를 나눈다. 짧게 주고받는 인사이지만 다음 토요일에 다시 만나자는 말도 함께 건네는 게 아닌가 싶다.

산책 끝 무렵에 이르면 넓은 공원이 하나 나온다. 공원에 가기 위해서는 계단이나 조금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하는데 언덕과 계단은 아이의 동네 자전거 여행 피날레를 장식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아이는 풀밭에 널브러진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하늘에 글자를 쓰듯 휘두르기도 하고 풀밭 사이를 헤집기도 한다. 가파르지 않은 언덕을 아이는 다리에 힘을 줘가며 올라서 산 정상에 도착한 듯 밝게 웃는다. 그러고는 곧바로 계단으로 달려가 또다시 다리에 힘을 주어 한 계단씩 조심스레 내려온다. 마지막 계단에 이르면 계획이라도 한 듯 숨을 한 번 고르고 뛰어내린다. 한 계단 위에서 뛰어내리는 재미를 알게 된 아이는 이번에는 계단을 몇 걸음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면서 마지막 계단에서 잠깐 멈췄다가 팔을 휘둘러가며 뛰어내린다. 땅바닥에 안전하게 착지하면 아이는 씨익 하고 소리도 없는 웃음을 짓는다. 넘어지지 않고 착지했다는 기쁨을 아이가 느끼는 순간이다. 

계단을 폴짝 뛰어내린 아이가 언덕을 또다시 오르더니 계단을 하나씩 내려오기 시작한다. 바닥에서 두 번째 계단을 그냥 내려오려던 아이가 다시 계단을 오른다. 그리고는 계단 하나가 아닌 두 계단 위에서 뛰어내릴 준비를 한다. 점프에 자신감이 붙었다고 스스로 생각했을까, 두 계단 위에서 잠깐 호흡을 고르더니 땅바닥을 향해 폴짝 뛰어내린다. 착지가 살짝 불안했고 오른쪽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가 이내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선다. 그러고는 쪼르르 서 있는 자전거를 향해 냅다 달린다. 

아이는 한시간 가까이 제 두 다리에 힘을 실어 페달을 밟아 산책로 끝까지 다다랐고, 뭔지 모를 상상을 하며 한참 동안 언덕과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한 계단 위에서 성공적으로 뛰어내린 아이는 두 계단 위에서 점프를 도전했다. 어느 누구도 거기서 뛰어보라고 하지도 않았고, 할 수 있다는 말도 건네지 않았다. 제 혼자 생각해보고는 해볼 만하다고 판단했고, 생각했던 대로 실행에 옮기는 순간이었다. 엉덩방아를 찧은 결과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해보고 싶고,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이 아이에게는 더 없이 소중해 보였다.

아이와 나는 마주 서서 물 한 모금씩 마시고 가던 길로 다시 움직인다. 시장 입구에 자전거를 세워 두고 시장 구경을 나섰다. 볶아 먹기 좋은 나물 한 봉지와 파 한대를 샀다. 다음에는 바퀴 달린 시장 가방을 챙겨와 장을 봐서 집에 돌아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집으로 향한다.

아이와 동행하는 공간을 조금씩 넓혀갈 때마다 아이의 움직임도 덩달아 커진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고 실행하는 경험을 몸으로 얻고 기억한다. 내 눈길이 닿지 않는 순간에도 아이는 제 성장 속도에 맞춰 자라고 있다. 머지않아 세 번째 계단 위에 서서 호흡을 고르고 점프를 준비하는 아이를 만날 것 같다.

우린 또 어떤 감동을 길 위에서 느끼게 될까. 다음 주 토요일 자전거 여행을 나도 덩달아 손꼽아 기다린다.

*칼럼니스트 김보민은 '한국땅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산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라는 호기심으로 2년째 싱가포르에 체류 중이다. 싱가포르에 올 때 4살이던 첫째와 생후 2개월이던 둘째는 어느덧 각각 6살, 26개월로 훌쩍 자랐다. 365일 여름이고, 아시아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주로 영어를 쓰고, 작은 나라이면서도 어마어마하게 큰 아시아를 가르쳐주고 있는 싱가포르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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