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힘이 세다, 잡초 같은 미나리처럼
사랑은 힘이 세다, 잡초 같은 미나리처럼
  • 칼럼니스트 최가을
  • 승인 2021.03.15 16: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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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엄마의 방구석 심야 영화관] 미나리(2020)

한 할머니가 있다. 손자의 말에 의하면 “보통 할머니와 너무 다르다.” 보통 할머니는 어떠냐는 할머니의 질문에 손자는 짜증스럽게 대답한다. “다른 할머니들은 쿠키도 잘 굽고, 욕도 안 하고, 남자 팬티도 안 입어.” 할머니는 요리 못하냐는 손자의 질문에 그는 당당하게 “응, 나 요리 못해!”라고 대답한다.

‘미나리’의 할머니 순자는 전형적인 할머니가 아니다. 그는 손주들을 돌봐주기 위해 이역만리 미국까지 건너왔지만, 자식들을 위해 무조건 희생하고 묵묵히 돌봄 노동을 수행하는 여성 캐릭터로 묘사되지 않는다.

대신 순자는 삶의 역경 앞에서 유머를 잃지 않는다. 미국에 이민 온 지 10년, 딸 모니카는 친정 엄마가 자신들이 이동식 주택에 사는 모습을 보게 됐다며 눈물 짓는다. 순자는 대답한다.

“왜 울어? 집에 바퀴 달려서? 난 재밌다, 얘.”

삶이 고단해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 할머니, 순자. ©판시네마
삶이 고단해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 할머니, 순자. ©판시네마(주)

제이콥은 도시에서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다가 아칸소 시골에 빈 땅을 사서 농장을 짓겠다는 꿈을 안고 있다. 제이콥에게는 원대한 꿈이지만 모니카에게는 남편의 무모한 도박으로 보인다. 이민 생활 10년 동안 어렵게 이룬 것을 모두 버리고 영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딸 가족의 삶을 직접 목격하게 됐지만, 순자는 한숨 짓지도 않고 불평하지도 않는다.

순자는, 긍정적으로 산다. 긍정적으로 산다는 말은 현실에 눈 감고 무턱대고 희망을 가진다는 의미일 때 아무 힘이 없다. 순자는 딸의 가족이 일확천금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실패할 거라고 단언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는 한국에서 소중히 가져온 미나리 씨앗을 심을 자리를 유심히 살펴본다. “미나리는 물만 있으면 어디에서든지 잘 자란다”면서,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그리고 노래한다. “미나리는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다 뽑아먹을 수 있고, 아플 땐 약도 돼. 미나리 원더풀 원더풀!” 순자의 긍정에는 힘이 있다.

순자는 손자 데이빗과 함께 외딴 계곡을 찾아내서 미나리를 심고야 만다. ©판시네마(주)
순자는 손자 데이빗과 함께 외딴 계곡을 찾아내서 미나리를 심고야 만다. ©판시네마(주)

그는 가족들에게 밥은 잘 못 차려줘도 사랑은 듬뿍 준다. 심장이 약한 데이빗을 두고 부모 모두가 “뛰지 마”를 입에 달고 살 때, 순자만이 말한다. “넌 스트롱 보이야. 내가 본 아이 중에 제일 스트롱 보이.” “뛰어도 돼, 넌 뛸 수 있어.” 꿈에서 천사를 보면 심장이 낫는다는 엄마의 말을 듣고 꿈에서라도 천국을 보기 무섭다면서 떠는 데이빗을 안고 할머니는 말한다. “별 소리를 다해. 내가 너 죽게 안 놔둬.” 순자의 사랑에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

모두가 데이빗이 약하다고 말할 때 '스트롱 보이'를 외치는 순자. ©판시네마(주)
모두가 데이빗이 약하다고 말할 때 '스트롱 보이'를 외치는 순자. ©판시네마(주)

이민 2세대인 정이삭 감독은 “경외하는 것을 멈추고 기억하기를 시작할 때 진짜 삶이 시작된다”는 작가 윌라 캐더의 문장에 영감을 받아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미나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감독은 자전적인 이야기가 흔히 빠질 수 있는 감상주의의 덫에 걸리지 않고 담담하게 한국인 이민자의 삶을 그려낸다.

이민자의 삶은 고단하다. 제이콥은 농장에 한국 채소를 심어서 미국으로 몰려드는 한국 이민자들에게 판매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미국 땅에 쉽사리 뿌리내리지 못하는 한국 채소들은 젊은 제이콥과 모니카 부부에 대한 비유로 보인다. 이는 이민 1세대들에게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자신의 뿌리를 통째로 뽑아 새로운 나라에 다시 심는 일은 존재 자체를 새로운 토질, 타국의 햇볕, 다른 수질, 이 모든 것에 적응시켜야 하는 일이다.

드넓은 땅을 보고 꿈에 부푼 아버지 제이콥과 불안해 하는 어머니 모니카. ©판시네마(주)
드넓은 땅을 보고 꿈에 부푼 아버지 제이콥과 불안해 하는 어머니 모니카. ©판시네마(주)

제이콥은 모니카에게 말한다. “한국에선 사는 게 너무 힘들었어. 기억 나? 우리 결혼할 때 미국 가서 서로를 구해주자고 했던 것.” 그러나 삶은 기대대로 흘러가 주지 않고, 서로를 구해주기는커녕 아이들을 건사하며 각자도생하기도 힘에 부치는 시간이 쉴새없이 휘몰아친다.

제이콥과 모니카의 갈등은 깊어지기만 한다. ©판시네마(주)
제이콥과 모니카의 갈등은 깊어지기만 한다. ©판시네마(주)

그러나 가족의 고통이 깊어서, 그들이 나누는 사랑은 더 귀하다. ‘미나리’는 그 사랑의 순간들을 절묘하게 포착해낸다. 제이콥이 꿈에 부풀어 거대한 트랙터를 몰고 뒤에 따라오는 아내와 아이들을 바라볼 때, 모니카가 직접 그네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태워주며 미소 지을 때, 기진맥진한 가족 넷이 함께 거실에 널브러져 곤하게 잘 때, 영화는 카메라로 서정시를 쓰듯이 내밀하고 아름다운 화면을 펼쳐 보인다.

자신이 만들어준 그네를 타는 남매를 보며 행복해 하는 모니카. ©판시네마(주)
자신이 만들어준 그네를 타는 남매를 보며 행복해 하는 모니카. ©판시네마(주)

가족이 해체될 정도로 강력하게 이들을 흔들어대던 고난은 데이빗의 대사 앞에서 잠잠해진다. “할머니, 이제 그만 우리 집으로 돌아가요.” 할머니에게 사랑을 받기만 했던 손자는 이제 그 사랑을 돌려준다.

할머니에게 자기가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손자 데이빗. ©판시네마(주)
할머니에게 자기가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손자 데이빗. ©판시네마(주)

“아이들도 한번은 아빠가 뭔가 해내는 모습을 봐야하지 않겠냐”며 남성 제이콥이 넓디 넓은 땅에 심었던 한국 채소 농사가 실패로 돌아간 반면, ‘보란듯이 사는 것’에 관심 없던 노년 여성 순자가 대충 심은 미나리는 끝까지 무럭무럭 자랐다는 결말은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이민자 가족의 세속적 성공을 그리지 않는다. 이들의 가장 어두운 시절을 고통스럽게 통과한다. 그럼에도 마냥 우울하지 않다. 이들의 사랑은 힘이 세기에. 어디에서든 잡초같이 살아남는 미나리처럼.

*칼럼니스트 최가을은 구 난임인, 현 남매 쌍둥이를 둔 워킹맘이다. 아이들을 재우고 휴대전화로 영화를 본다. 난임 고군분투기 「결혼하면 애는 그냥 생기는 줄 알았는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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