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라, 신혼침대
잘 가라, 신혼침대
  • 칼럼니스트 최은경
  • 승인 2021.04.19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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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육아] 결혼 16년 만에 침대를 바꾸면서

'삐그덕.'

처음엔 그저 잠깐 나는 소음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침대에 오르내릴 때마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삐그덕삐그덕" 소리를 냈다. 침대가 '아이고... 아이고 죽겠네' 하는 것 같았다. 그거 내가 침대에 누워서 자주 하는 말인데... 침대도 주인을 닮나. 그럴 법했다. 15년을 넘게 썼으니까.

신혼가구는 대부분 세트로 구입한다. 새하얀 장롱에, 화장대 그리고 이 침대까지 풀세트로 구입했다. 세월이 지나도 전혀 유행을 타지 않는 색과 디자인이었다. 가구를 볼 때마다 "참 잘 샀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특히 부드러운 곡선의 침대 헤드는 기대서 책 읽기도 좋았다.

말이 나온 김에 이 침대로 말할 것 같으면... 새신랑이 두 손을 곱게 모으고 마치 관 속에 누운 드라큘라처럼 잔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그에 반해 나는 자는 내내 왼쪽, 오른쪽으로 뒤척이는 타입이라는 걸 새신랑에게 알려줬을 거다. 서로의 잠버릇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던 이 침대에서 우리는 함께 잠들고 일어나 일하고 다시 잠들었다.

시간을 흐르고 큰아이가 태어났다. 남편은 다음날 출근해야 하니까, 혹은 애가 울어 시끄러워 잠을 잘 수 없다는 이유로 다른 방으로 잠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내가 두세 시간에 한 번씩 침대에서 밤중 수유를 할 때마다 그는 같이 일어났다. 내가 손수건과 수유쿠션을 챙기는 등 수유 준비를 하면 남편은 배고프다고 우는 아이를 안아 달래며 시간을 벌어줬다. 수유가 끝나면 아이를 아기침대에 조심스럽게 옮겨 재웠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이 침대에서 지쳐 잠이 들었다. 돌 전까지 수유 기간 동안 남편은 늘 그랬다. 함께 하는 육아의 시작이었다.

다시 시간이 흘러 둘째를 낳았다. 둘째는 모유수유를 하지 못했다. 수유를 할 수 없을 만큼 내 몸이 아팠다. 내 몸 아파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음에도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에 남모르게 눈물을 흘린 곳도 이 침대였다. 아픈 나의 몸과 마음을 쉬게 해 준 것도 이 침대였다. 회사 일로 지친 날에도 이 침대에서 푹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신혼집에서 4년, 그 후 10년을 살던 아파트에서 이사를 앞두고 고민했다. 침대를 가져갈까 말까. 멀쩡해서 버리긴 아깝고, 가져가자니 한 번씩 나는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신경 쓰였다. 우리는 비용 절감을 선택했다. 매트리스만 바꾸고 침대 프레임은 가져가기로 했다. 이미 이사를 준비하면서 비용이 적지 않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 이사 후 침대의 삐그덕 소리가 점점 더해졌다.

40대에 들어서면 매해 몸이 달라진다고 하더니 나도 나이가 든 탓일까. 전에 없이 소리에 민감해졌다. 코로나19 때문에 하루 종일 집에서 일하고, 생활한 탓인지 윗집인지 어딘지에서 나는 생활 소음에도 적지 않게 신경 쓰였다.

밤 11시가 넘어(윗집 아저씨 퇴근했나 보다) 혹은 새벽 6시가 넘어(윗집 아저씨 출근하나 보다) 세면대에 면도기 치는 소리(남편에게 물어보니 면도기에 낀 털을 빼려면 저렇게 쳐야 한다나), 쿵쿵 발도장 소리, 오전 9시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청소기 소리, 의자 끄는 소리, 뭘 그렇게 자주 떨어트리는지 와르르 쿵쿵 무너지는 소리 등등이 신경 쓰이기 시작하면서 소리에 대한 나의 예민도는 점점 높아져갔다.

이게 거의 1년째다. 이웃에게 층간소음의 불편함을 호소하지는 않았다. 오랜 시간 지속적이지는 않아서다. 대신 내 환경을 바꿨다. 내 아랫집으로부터 층간소음에 대한 항의는 한 번도 듣지 않았으나 식구별로 실내화를 준비하고 의자마다 소음방지용 캡을 씌웠다. 우리 집에서 나올 수 있는 소음은 무조건 차단하고 싶었다. 그런데 침대에서 나는 소음은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아랫집에도 들리면 어떡하지? 나처럼 말도 못 하고 매일 힘들어하고 있으면 어떡하지?'

침대에 누울 때마다, 뒤척일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다. 침대 삐그덕 소리와 함께 내 마음도 함께 삐그덕거렸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잠이 편하게 올 리가 없다. 기어이 어느 날은 잠을 새벽 4시까지 설쳤다. 남편은 아니었다. "계속 써도 될 것 같은데..."라며 그다지 신경 쓸 만한 소음이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니라고, 나는 무척이나 마음이 쓰인다고! 내 하소연에 남편이 뒤늦게 침대 균형을 맞춘다면서 이리저리 뭔가를 괴어 두었지만, 그때 잠시만 괜찮을 뿐 다시 삐그덕, 삐그덕, 삐그덕... 소리는 계속 되었다. 이번에는 침대가 "더 이상 너랑 잠들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에잇 그렇다면 나도 안녕이다.

잘 가, 신혼 침대. 폐기물스티커까지 잘 붙여주었다.
잘 가, 신혼 침대. 폐기물스티커까지 잘 붙여주었다.

그렇게 새 침대가 우리 집으로 왔다. 새 가구를 들이면서, "첫 침대 프레임을 15년 넘게 썼으니 이 침대도 그 정도 수명이라고 치면 우리도 환갑을 바라보이는 나이겠다. 그때는 각자 싱글 침대를 사서 써보는 것도 좋겠다"라고 했더니 남편이 하는 말...

"아니 난 괜찮아... 난 계속 이 침대 쓸게. 자기는 바꿔."

"뭐? 하하하. 그래 퀸사이즈 침대 혼자 쓰는 것도 좋겠네. 언제 그래 보겠어. 그러셔. 나는 새 침대로 바꿔 탈 테니..."

과연 알뜰한 남편다운 발언이로고. 다행히 새 침대에 대한 적응기간은 필요없었다. 잘 자고 일어났다. 그런데 나는 자꾸 신혼 침대와 마지막 밤을 보내던 날, 열한 살 작은 아이가 한 말이 떠올랐다. 자기 전에 늘 우리 침대로 와서 "안녕히 주무세요" 인사를 하고 가는 열한 살 둘째가 그날도 침대에 먼저 올라와 뒹굴고 있어 내가 말했다.

"윤아, 이 침대 우리 가족하고 오늘이 마지막이야. 안녕, 하고 인사해."

"아 그래? 침대야 잘 가, 어디서든 좋게 다시 태어나."

뭔가 훅 치고 들어오는 이 뜨겁고 울컥한 감정은 무엇인가. 나는 미처 생각도 못한 마음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 가족과 함께 지낸 가구를 떠나보내는 아이의 따스하고 다정한 말을 듣자니 나도 다정한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도 쓴다.

'잘 가라, 나의 신혼침대. 15년 넘게 고마웠어. 내 아이 말대로, 그럴 수만 있다면 어디서든 좋게 다시 태어나렴.'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기자로,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연재기사를 모아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성에 대해 아는 것부터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서 성교육 전문가에게 질문한 성교육 책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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