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이런 남자친구가 되렴
아들아, 이런 남자친구가 되렴
  • 칼럼니스트 최가을
  • 승인 2021.06.1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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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엄마의 방구석 심야 영화관] ‘야구소녀’(2019)

아들이 따뜻하고 다정한 남자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나중에 여자 애인이 생긴다면, 남자니까 자기가 여자보다 잘나야 한다는 허위의식 없는 애인, 여자 친구를 섬세하게 배려할 줄 아는 파트너가 되면 좋겠다. 일견 소박해 보이는 꿈이지만 아들이 명문대생이 되거나 크게 출세하기를 바라는 것보다 원대한 야망일지도 모른다. 아들이 성인이 될 때쯤에는 세상이 지금과 다르기를 바라지만 세상이 손쉽게 변하지는 않으니까.

이런 세상에서 아들에게 보여줄 만한 남자친구 역할 모델은 누구일까. 영화 ‘야구소녀’를 보다가 그 실마리를 찾았다. ‘야구소녀’의 주인공 ‘주수인’을 좋아하는 ‘이정호’가 그런 모델이 돼 줄 만한 캐릭터였다.

프로 야구 선수를 지망하는 주수인.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싸이더스

주수인과 이정호는 둘 다 프로 야구 선수를 지망하는 고교 야구부원이다. 그런데 문제는 주수인은 여자고, 이정호는 남자라는 데 있다. 이정호는 프로 구단과 계약에 성공했고, 주수인은 아니다. 둘의 실력 차이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구속 130km를 기록하는 여자 선수는 드물다는데 주수인은 그런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다. 한국에 프로 여자 야구 리그가 있었다면 무리 없이 프로의 세계에 진입했을 실력이다.

그런데 한국에는 여자 리그가 없다. 주수인에게는 유리천장이라는 용어마저 사치다. 유리천장은커녕 아예 여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판 자체가 짜여있지 않은 세계에서 자기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현재의 프로 야구 리그에 여자라고 해서 진입하지 못한다는 법적 조항은 없다. 그러므로 주수인은 남자들만이 가득한 프로 야구 리그를 최초의 여자선수로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주수인을 좋아하는 이정호. ⓒ싸이더스
주수인을 좋아하는 '남사친' 이정호. ⓒ싸이더스

감독은 핸드볼로 종목을 바꿔 보라고 하고, 엄마는 공장에 취직하라고 종용한다. 모두가 포기하라고 하지만 주수인은 손가락에 피가 날 때까지 공을 던진다. “그 사람들이 내 미래를 어떻게 알아요? 나도 모르는데.”라고 중얼거리면서. 오직 프로 선수가 되겠다는 열망 하나로. 강하고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만이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 야구계의 드높은 벽을, 변화무쌍한 너클볼이라는 무기로 돌파하려고 한다.

가능성이 없다면 포기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주수인의 엄마. ⓒ싸이더스
가능성이 없다면 포기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주수인의 엄마. ⓒ싸이더스

이정호는 주수인의 꿈을 얕잡아 보지 않는다. 주수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성심성의껏 돕는다. 여자라서 안 된다고, 입도 뻥끗하지 않는다. 이정호는 주수인보다 앞서가지 않는다. 남자가 여자를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주수인이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대로 움직이면, 이정호가 그 길을 뒤따라간다.

우리 아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여자 친구를 ‘여자’ 친구로 보지 말고, 완벽한 타인으로 보고 그의 꿈을 지지해주면 좋겠다. 사실 타인의 꿈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는 건 오만 아닌가. 여자 친구 인생의 방향 키는 여자 친구가 잡고 있는 것, 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땀 흘리면서 노를 젓는 애인 옆에서 부채질해주는 정도일 뿐이다.

주수인에게 너클볼 던지는 법을 훈련시키는 최 코치. ⓒ싸이더스
주수인에게 너클볼 던지는 법을 훈련시키는 최 코치. ⓒ싸이더스

이정호는 ‘맨스플레인’하지 않는다. 어떻게라도 주수인을 돕고 싶은 이정호는 자신을 인터뷰하러 온 기자에게 주수인도 인터뷰하라고 권하면서 말한다. 주수인의 구속이 족히 130은 된다고. 여자선수로서는 대단하지만, 남자선수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구속이다. 주수인은 퉁명스럽게 응수한다. “내가 130 던지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거야? 왜? 그게 왜 대단한 건데?” 여자치고는 잘 던진다고 추켜세운 것 아니냐는 일침이다.

이정호는 가만히 있는다. 내 도움을 무시하는 거냐고 화내지 않는다. ‘아,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바로 깨닫고 입을 다문다. 아들아, 너도 여자 친구한테 지적 받으면 네 잘못을 신속히 인정하는 애인이 되렴.

"내가 130 던지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거야?" 주수인의 일갈. ⓒ싸이더스
"내가 130 던지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거야?" 주수인의 일갈. ⓒ싸이더스

이정호는 섣불리 다가가지 않는다. 이정호는 주수인을 마음 속 깊이 좋아하고 응원하지만, 주수인은 야구에 정신이 팔려 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건 옛말이다. 이정호는 주수인에게 마구잡이로 다가가서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호소하지 않는다. 그는 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주수인 옆을 지킨다. 상대를 좋아하는 자신의 감정만큼, 자신을 이성으로 보지 않는 상대의 감정도 똑같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박력있게 들이대는 것이 남자다운 것이 아니다. 얌전함은 여자만의 덕목이 아니다. 남자도 얌전히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아들이 사랑하는 상대가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엄마 된 입장에서 마음은 좀 아프겠지만 어쩌겠나. 함부로 다가가지 말고 상대의 마음이 돌아설 때까지 노력해 보기를, 노력도 먹히지 않는다면 적절한 시점에 포기하고 철수하기를 바랄 수밖에.

"사람들이 내 미래를 어떻게 알죠? 나도 모르는데." ⓒ싸이더스
"사람들이 내 미래를 어떻게 알죠? 나도 모르는데." ⓒ싸이더스

너클볼을 던지려면 손톱으로 야구공을 꾹 눌러서 쥐어야 한다. 이정호는 주수인에게 손톱을 보호하는 용도라면서 투명 매니큐어를 선물한다. 이걸 바르면 예뻐지는 거냐는 어린 여동생의 질문에 주수인은 대답한다. “이건 예뻐지는 거 아니야. 이건 그냥, 단단해지는 거야.”

여자들이 예뻐지기를 요구하는 세상에서 단단해지기를 갈망하는 야구소녀 주수인. 그리고 주수인에게 예뻐지기 위한 선물이 아니라 단단해지기 위한 선물을 건넬 줄 아는 이정호. 아들아, 훗날 커서 주수인 같은 보석을 알아보는 눈 밝은 남자가 되렴. 그리고 주수인의 매니큐어처럼 그 여자에게 가장 필요한 선물이 무엇일지 잘 고민하는 애인이 되길 이 엄마가 바라마지 않는다!

*칼럼니스트 최가을은 구 난임인, 현 남매 쌍둥이를 둔 워킹맘이다. 아이들을 재우고 휴대전화로 영화를 본다. 난임 고군분투기 「결혼하면 애는 그냥 생기는 줄 알았는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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