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살 아이가 주방에서 노는 이유
열한 살 아이가 주방에서 노는 이유
  • 칼럼니스트 최은경
  • 승인 2021.08.21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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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육아] 코로나 시대 아이의 놀이

 

아이는 심심했던 모양이다. 뭐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어느 날부터 내가 주방에서 음식을 할 때마다 “내가 해볼게”라는 말이 늘었다. 혼자 밥 먹고, 양말 신고, 신발 신고, 옷 입고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직접 요리를 해보겠다고 나서다니 시간이, 세월이 그저 놀랍다.

전을 부치고 있는 아이
전을 부치고 있는 아이

시작은 전 부치기였다. 비가 자주 오던 무렵, 집에 있는 시간이 늘면서 저녁 이후 간단히 간식을 해 먹을 때가 많았다. 친정엄마가 가져다주신 야채가 너무 많아서 소진을 목적으로 이것저것 다 때려 넣어 야채전 반죽을 만들었다. 이제 부치기만 하면 되는데 아이가 그걸 해보겠다는 거다. 화구가 가스레인지가 아니라, 인덕션이라 불 사용이 크게 위험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프라이팬에 살이 닿으면 뜨거우니 조심해서 한번 해보라고 기회를 주었다. 두껍게 부쳤다가 맛이 없으니 얇게 펴서도 부치고, 작게 모양을 만들었다가 여러 개 만드는 게 귀찮은지 크게도 부치더니 아이가 하는 말.

“엄마, 이거 재밌어.”

“그래? 신기하네. 엄마는 더운데 불 앞에서 전 부치기 싫어.”

“그래? 그럼 이거 내가 다할게.”

그렇게 한두 번 전을 부치더니, 이제 자연스럽게 아이는 우리 집 전 담당이 되었다. 큰애는 내가 주방에서 뭘 해도 크게 반응이 없는데 작은 아이는 다르다. 뭘 만드는지, 어떻게 만드는지 궁금해한다. 그러다 제 입에 맞는 반찬을 만나면 기꺼이 제가 요리를 하겠다고 나설 때가 많았다. 계란말이, 계란볶음밥, 계란 프라이에 이어 요즘은 김치볶음을 해서 먹는다. 김밥 재료도 제가 먹고 싶은 것을 넣어 이 세상에 없는 김밥을 만들어 먹는다. 직접 만들면 더 맛있는지 다 먹으라고 하지 않아도 밥그릇을 싹싹 비운다.

그때부터 “내가 한번 만들어보겠다”는 아이의 제안을 대부분 거절하지 않았다. 아이가 요리에 재미를 느끼고 잘 안 돼도 다시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아이에게 요리는 내가 생각하는 요리와 달랐다. 한 끼니를 만드는 가사 노동이 아니라, 집에서 할 수 있는 놀이였다. 나는 가사 노동을 덜고, 아이는 즐거움을 얻는 시간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치우는 거야 뭐, 그건 내 전문이니까. 내가 해도, 아이가 해도 치우면 그뿐이다.

과자를 크림과 분리하고 있는 아이. 저만의 방법으로 만들어 먹는다.
과자를 크림과 분리하고 있는 아이. 저만의 방법으로 만들어 먹는다.

아이는 음식뿐만 아니라 디저트 하나도 그냥 먹지 않는다. 엄마 어렸을 적에 먹었던 추억의 과자 산도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먹는다. 과자랑 크림을 분리해서 제가 만들어 먹고 싶은 대로 먹는다. 과자는 부수고, 따로 모아둔 크림은 다시 동그랗게 만든다. 그리고 부순 과자 위에 크림을 굴려 먹는다. 이렇게 먹는 게 훨씬 더 맛있단다. 그게 왜 더 맛있지? 나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어차피 같은 맛 아닌가. “그냥 먹어도 되는데, 왜 굳이 이렇게 하는 거야?” 물어도 이유는 없다. 그냥이다.

방울토마토 에이드. 데코까지 완벽하게 한 잔.
방울토마토 에이드. 데코까지 완벽하게 한 잔.

아이가 '굳이' 하는 일은 또 있다. 방울토마토를 으깨서 토닉워터를 부어서 토마토 에이드를 만들어 먹는다. 그 전에는 오미자 에이드, 매실 에이드, 레모네이드를 만들어 먹었다. 더 새로운 걸 만들어 먹고 싶어서 매번 도전한다. 아오리 사과를 갈아서 토닉워터를 부어서도 먹어 본다. 바나나와 사과를 같이 갈면 어떠냐고 제안한다. 뭔가 어색해서 검색해보니 잘 어울리는 과일이었다. 아이는 대단한 걸 발견이라도 한 듯 신이 나서 바나나사과주스의 효능까지 꼼꼼하게 읽는다. 자두도 그냥 먹지 않는다.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서 자두 셔벗 같은 디저트를 만들어 먹는다. 그냥 먹어도 되는데, 왜 굳이? 한 마디로 평범함을 거부한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또 말이 나온다. 아이는 “그냥” 혹은 “이렇게 먹으면 더 맛있으니까” 하고 만다.

껍질과 씨를 잘 분리해서 플레이팅한 자두.
껍질과 씨를 잘 분리해서 플레이팅한 자두.

회사 일을 오래 하다 보면, 늘 하던 일이 갑자기 너무너무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해야 하나 싶은 마음. 늘 하던 일 말고 새로운 일에 대한 갈증이 생긴다. 그래서 이직을 하나 싶은데, 나는 이직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기에 이 안에서 새로운 일을 궁리하게 된다. 해 본 거 말고(이거라도 잘해야 하는데), 안 해 본 거 새로운 거에 도전하고 싶다. 

잘 될지 안 될지 결과를 알 수 없고, 그걸 하기까지 어떤 노력과 과정이 필요한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쉽지는 않을 거라 짐작만 할 뿐), 하냐 마냐를 두고 고민일 때는 언제나 ‘하고 싶은’ 마음이 이긴다. 늘 하던 거만 하면 재미없으니까.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하고 싶었던 그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얼마나 흥이 나는지 모른다. 이렇게 해보니, 이 일은 이런 재미가 있구나. 이걸 왜 이제야 했을까, 좀 더 빨리 했어도 좋았겠다 싶은 그런 일들이 있다. 잘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이건 잘 안 먹히는 구나 하고 받아들인다. 경험에서 배우는 걸 좋아하는 나는 뭐든 한번 해보는 편이다.  

이것저것 마구 시도해보는 아이를 보면서 “너도 그런 거니?”라고 물을 뻔했다. 똑같은 하루의 반복,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코로나 시대의 일상. 집안에만 있는 아이가 시도해볼 수 있는 것이라곤 인터넷과 주방뿐이었던 거다. 인터넷을 오래 하면 엄마에게 혼이 나지만, 주방에서는 뭐든 할 수 있고, 새로운 경험이 가능했던 것이다. 새로운 재료, 새로운 요리 방법, 이것 저것 섞으면 달라지는 맛. 신기하고, 재밌고, 맛있으면 기쁘고 실패하면 다음엔 안 해 먹으면 되는,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 아이는 이런 주방의 매력에 빠져버린 거였다. 

나는 앞으로도 아이에게 주방 문을 활짝 열어둘 생각이다. 뭐든 할 수 있게 해 줄 거다. 새로운 것을 맛보고 즐길 수 있도록 시간과 재료와 기구를 아끼지 않을 거다. 새로운 거 하고 싶은데 못하게 하면 얼마나 속상한지 내가 제일 잘 아니까.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기자로,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연재기사를 모아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성에 대해 아는 것부터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서 성교육 전문가에게 질문한 성교육 책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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