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모르실 거야/얼마나 사랑했는지/세월이 흘러가면은/그때서 뉘우칠 거야’ 혜은이의 노래 ‘당신은 모르실 거야’가 아홉 살 진희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저 유명한 사랑 노래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영화의 내용과 맞물려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게 딸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로 들렸다. 내가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빠는 모르지요.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면 나를 버린 걸 뉘우치게 될 거예요.
진희의 아빠는 어느 날 진희를 보육원에 데려다 주고 마지막 인사도 없이 홀연히 사라진다. 영화 ‘여행자’는 진희가 친부에게 버림받고 프랑스인 양부모를 만나기 전까지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1년을 그린다. 상황은 극단적이지만, 영화는 물기를 담뿍 머금은 수채화처럼 담담하고 투명하게 아이의 심리를 묘사한다.
우선 진희는 아빠와 헤어진 후 첫 단계로 현실을 부정한다. 아빠가 데리러 올 거라고 덤불 속에 숨어서 보육원 건물에 발도 들이지 않고, 입소를 거부하며 높은 곳에 기어 올라간다. 그러나 당연히, 아무리 기다려도 아빠는 오지 않는다.
진희는 나름의 논리를 세워서 아빠가 자기를 버린 이유를 유추한다. “내가 잘못해서 새엄마의 아기를 옷핀으로 찔렀어요. 아빠랑 새엄마가 화가 나서 여기 오게 된 거예요.” 아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어떻게든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려고 애쓴 거 아닐까. 마음이 저릿했다.
현실을 부정하다가 상황을 이해한 듯 보였던 진희가 어른들에게 의외의 일격을 한다. 보육원 원장을 직접 찾아가 부탁하는 것이다. 우리 아빠에게 전화 좀 해 달라고. 원장은 전화번호를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자 아이는 또박또박 자신이 살던 집 주소를 댄다. 여기에 찾아가서 아빠를 만나겠다고.
아홉 살 아이가 ‘아빠에게 전화하기’, ‘내가 기억하는 주소로 찾아가보기’와 같은 대안을 찾아내기 위해 얼마나 골똘히 머리를 굴렸을까? 아이는 주어진 현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자기만의 대책을 생각해내고 현실을 돌파하려고 주체적으로 행동한다. 영화는 진희를 단순히 불쌍한 아이로 납작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장이 며칠 후 진희를 부른다. 자신이 그 집에 찾아가봤지만 네 아빠는 이사를 갔고, 이웃들도 어디로 이사 갔는지 모른다고 타이른다. “너도 다 잊어버려야 돼. 아빠 절대 다시 안 오셔. 넌 여기서 새 가족, 새 부모를 만날 거야. 알았지?”
진희는 분노한다. 땅에 커다란 구멍을 파서 시체처럼 드러눕고, 친구들의 인형을 뺏어 죄다 망가뜨린다. 진희는 있는 힘껏 몸부림 쳐봤지만, 주어진 현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어디 나가서 돈을 벌 수 있는 나이도 아니고, 비를 가려줄 지붕과 하루 세 끼 식사 제공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돌봄이 절실한 나이다. 진희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는 원장이 말한 그대로다. 아빠를 잊고, 새 부모를 찾아야 한다.
진희의 프랑스 입양이 결정된다. 진희의 아빠는 진희와 헤어지던 날, 여행을 보내주는 거라면서 예쁘고 비싼 새 옷을 사 주는데, 진희는 그 옷을 입고 프랑스로 먼 여행을 떠나게 된다. 프랑스행 비행기 안에서 진희는 아빠와의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린다. 아빠 허리를 꼭 잡고 아빠의 등에 기대 자전거 뒷자리에 탔던 기억. 부녀의 뒷모습은 밤거리의 어둠 속에 완전히 잠긴다. 마치 프랑스 땅을 밟기 전 진희의 머릿속에서 아빠와의 추억을 지우는 것처럼.
마지막 장면은 프랑스 공항이다. 진희가 양부모를 찾아 두리번대는 모습으로 영화는 끝난다. 아이는 프랑스에서 두 번째 삶을 시작할 것이다. 영화는 실제 프랑스 입양아인 우니 르콩트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이다. 감독은 성인이 되어 유능한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뒤늦게 영화 공부를 해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
진희는 아빠를 간절하게 찾고, 하염없이 기다린다. 사실상 아이가 어렸을 때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란 얼마나 비대칭적인가. 아빠는 진희 없이 살 수 있지만, 진희는 아빠 없이 살 수 없었다.
물론 진희 아버지가 마음 편하게 잘 먹고 잘 살았을 거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진희가 없어도 돈을 벌거나 가정을 유지하는 등 자신의 삶을 꾸리는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진희에게는 상황이 다르다. 아빠가 없으면 진희는 생존을 위협 받는다. 아빠가 사라진 후, 진희에게는 아빠의 빈자리를 메꿔줄 어른이 반드시 필요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제공하는 또 다른 어른 말이다.
그러니 이 비대칭적이고 불공평한 사랑에 ‘당신은 모르실 거야, 얼마나 사랑했는지’라는 가사는 얼마나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인지.
*칼럼니스트 최가을은 구 난임인, 현 남매 쌍둥이를 둔 워킹맘이다. 아이들을 재우고 휴대전화로 영화를 본다. 난임 고군분투기 「결혼하면 애는 그냥 생기는 줄 알았는데」를 썼다.
【Copyrightsⓒ베이비뉴스 pr@ibaby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