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돌봄 때문에 학업 기회도 놓치는 '영케어러'를 아시나요?
가족 돌봄 때문에 학업 기회도 놓치는 '영케어러'를 아시나요?
  • 기고=채희옥
  • 승인 2023.10.16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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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의 시간에 붙잡힌 아이들] 1. 채희옥 초록우산 옹호기획팀장
초록우산 채희옥 옹호기획팀장. ⓒ초록우산
초록우산 채희옥 옹호기획팀장. ⓒ초록우산

#1. “자퇴하는 건 어때?” 정신질환이 있는 어머니를 돌보는 형준이(가명)가 학교에 결석하는 날이 많아지자 학교 선생님에게서 들은 권유다. 결국 형준이는 자퇴를 했고 집안일을 하며 엄마와 어린 동생을 챙기고 있다. 이렇게 형준이는 학교에서의 시간을 잃었다.
 
#2. “지원 대상이 아닙니다.” 치매를 앓는 할머니의 간호와 가사를 도맡은 은지(가명)가 기초생활수급 책정 등 도움을 구하기 위해 찾아간 동주민센터에서 돌아온 답변이다. 이후 많은 곳의 문을 두드려 봤지만 받을 수 있는 지원은 없었다. 이처럼 동분서주하면서 시간을 빼앗긴 은지는 점차 사회에서 고립되어 갔다.

지금껏 우리 사회는 형준이와 은지를 그저 가난하고 부모가 아픈,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기특하게도 부모를 잘 돌보고 있는 ‘효자, 효녀’로 불렀다. 안타깝지만 일부 가정의 일이고, 가정사이니 그 구성원이 알아서 견디고 극복해야 하는 일로 여겼다. 국가와 사회가 이렇게 외면하면서 수많은 형준이와 은지는 집 안에 숨을 수밖에 없었고, 이들에게 닥친 문제는 사회적 의제로 나오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은 누구고, 이들이 겪고 있는 일들은 무엇인가.

해외에서는 고령 또는 장애, 질병 등으로 도움이 필요한 가족 구성원을 직접 돌보는 아동·청소년을 ‘영케어러(Young  Carer)’로 규정한다. 영국, 호주 등 일부 국가에서는 일찍이 이들의 존재를 인지하고 발굴 및 지원체계 전반을 아우르는 법률을 제정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한 세부 정책들도 실행하는 곳도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영케어러와 관련한 국제비교연구에서 ‘무반응 국가’로 분류된다. 아동의 가족돌봄 문제가 사회적 공론장에 나오기 시작한 것도 불과 2년 전이다. 지난 2021년 5월 병든 아버지를 홀로 돌보던 아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다 아버지를 방치해 사망에 이른, 이른바 ‘영케어러 간병 살인’ 사건으로 알려진 비극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그동안 수면 아래 있던 영 케어러의 존재가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사회적 문제가 되자 이들을 부르는 이름이 등장했고 현황 파악을 위한 실태조사 및 각종 지원 정책이 추진됐다. 무반응보다야 진일보한 셈이지만 정부 부처, 지방자치단체, 국회 등 실행 주체에 따라 접근이 각기 달라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을 바탕으로 지원이 이뤄지는 수준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다.

우선 이들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국가통계가 없다. 보건복지부, 국회 입법조사처, 서울시 등이 설문 조사나 연구 등을 통해 도출한 결과값이 있긴 하지만, 추산치의 규모가 각기 달라 일관성 있게 분석을 하거나 정책을 수립하는 데 활용하긴 어려운 실정이다. 가족을 돌보는 아동, 청소년을 부르는 명칭이나 지원 정책도 가지각색이다. 보건복지부는 ‘가족돌봄청년’으로 규정하고 14세부터 34세로 연령을 한정해 사업들을 추진하고 있는 반면, 각 지자체에서는 ‘가족돌봄청년’, ‘가족돌봄청소년’, ‘가족돌봄아동·청소년’, ‘가족돌봄청소년·청년’ 등으로 다양하게 정의하고 있다. 명칭에 따라 연령 규정이나 지원 자격도 상이하다. 즉, 어느 부처가 담당하는지나 어디에 사는지에 따라 같은 아이라도 정책 대상에 포함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가족을 돌보는 아동, 청소년들에 대한 일관성 없는 정의와 지원체계는 당사자 스스로 본인의 정체성을 인지하고, 정책에 접근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현재 진행 중인 대부분의 지원 사업들이 신청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것도 사회적 경험이 부족한 이들에게는 큰 장벽이 된다. 여기에 촘촘한 관계망을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발굴체계도 부재하다. 행정상 위기 지표 등을 통해 기존 복지체계 안에서만 찾으려고 하거나 아동청소년 시설, 학교 등 관련기관에 설문 공문을 보내는 시도만으로는 사회 저변에서 가족을 돌보는 아이들을 찾아내기엔 한계가 있다. 실제로 아동복지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가족을 돌보는 아동을 이해하고 인지하는 수준과 방식이 천차만별이어서 이들을 정확하게 구분, 발굴하는 것조차 어려워 지원책을 찾아 연계까지 하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다는 지적이 쏟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가정의 테두리를 넘어 공론장에 나오기 시작한 아이들이 생겨나는 것은 유의미하다. 이 아이들을 또다시 사각지대에 갇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가족을 돌보는 아동을 아우르는 정확한 법률적 정의를 통해 연령이나 지역 등에 따라 배제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 교육기관, 사회복지 현장, 병원 등을 대상으로 가족돌봄아동에 대한 교육과 홍보를 강화하고 국가 주도 아래 체계적이고 일관된 발굴 및 조사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복잡한 신청주의의 한계를 넘어서 가족을 돌보는 상황에 직면한 아동이라면 누구나 쉽고 빠르게 지원 가능한 모든 정책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적합한 서비스가 바로바로 연계될 수 있는 원스톱 지원시스템도 마련되어야 한다고 본다.

형준이가 다니던 학교에 가족을 돌보는 학생들에 대한 이해와 지원책이 있었다면, 은지가 찾았던 주민센터에서 기초생활수급 여부 판단만이 아닌 가족돌봄을 완화하기 위한 정책까지 연계할 수 있었더라면 이 아이들에겐 삶을 바꿀 수 있는 ‘나의 시간’이 주어졌을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에서 아동의 가족돌봄은 더는 효자, 효녀가 알아서 해야 하는 일이 되어선 안 된다. 아이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고, 가족돌봄으로 인해 상실한 아이들의 시간을 되찾아 주는 일은 우리의 미래를 위해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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