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만 남겨두면 되는 줄 알았다
치킨만 남겨두면 되는 줄 알았다
  • 칼럼니스트 최은경
  • 승인 2023.11.16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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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오답노트] 성향의 차이를 알았다면

"나 화요일에 회식이야."

남편 말에 내가 말했다. 

"그럼 나도 회식해야지. 얘들아, 내일 저녁은 우리도 치킨에 회식하자."

재택러에게 저녁 회식이 얼마만인가.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온 2호가 신이 나서 말했다.

"엄마 오늘 학교에서 6학년 전체 학생이 독서골든벨했는데 나 몇 등 했게?"

"응... 글쎄..."

"엄마, 나 4등 했어."

"오, 완전 잘했네! 평소 네가 읽던 책에서 문제가 많이 나왔어?"

"아니, 이거 우리 온책읽기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만 문제 나온 거야."

"아, 그렇구나. 오늘 우리 회식인데 언니 오면 축하파티도 하자."

"좋아, 나 진짜 대단하지?"

기분이 좋은 2호의 어깨가 천장을 뚫고 나갈 기세다. 마침 친한 동생이 쿠폰을 선물해 준 게 있어 배달비도 아낄 겸 퇴근 후 직접 가게로 나갔다. 그리고 치킨을 사서 집으로 왔는데... 이런... 2호가 잔다. 

"엄마 치킨 사왔는데 얼른 나와 먹어."

잠결에 일어나긴 했는데 나오질 않는다. '그렇게 피곤한가' 싶어서 나는 1호와 단 둘이 회식을 감행했다. 학교 갔다온 1호도, 하루 종일 일한 나도 배가 고프니까. 이것이 초래할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우리집은 주로 닭다리가 두 개 뿐인 프라이드 치킨을 시키지 않는다. 닭다리도, 날개도, 윙도, 닭봉도 넉넉한 메뉴를 고른다. 엄마도 닭다리 좋아하니까. 그나저나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데 전혀 일어날 기미가 안 보인다. 더 자게 두자 싶어서 2호 몫으로 치킨을 예쁘게 세팅해놨다. 저녁 8시가 되어서도 일어나지 않길래 배가 고플 것 같아 깨웠다.

"일어나, 벌써 저녁 8시야. 배 안 고파? 얼른 치킨 먹어."

"엄마랑 언니는 안 먹고 기다렸어?"

"아니, 우리는 이미 먹었지. 네가 깨워도 안 일어나길래 피곤한가 보다 해서."

자는 애를 깨우지 않았을 뿐인데... 파티를 즐기고 싶은 그 마음은 생각 못했다. ⓒ최은경
자는 애를 깨우지 않았을 뿐인데... 파티를 즐기고 싶은 그 마음은 생각 못했다. ⓒ최은경

2호는 울상이 되었다. 그 모습에 나는 당.황.했.다. '왜 그러지? 치킨 남겨놨는데? 뭔 문제가 있나?' 2호는 침대에 앉은 채로 나오질 않고 나는 소파에서 모처럼 1호와 영어회화 책을 넘기면서 웃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한동안 둘째가 나오지 않기에 왜 그러냐고 물었다. 할 말이 있으면 나와서 하라고 하면서. 둘째는 언니가 있는 곳에서 이야기 하기 싫다며 단 둘이 나와 이야기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 그러자. 울음을 삼키면서 2호는 꿋꿋하게 말했다. 

"엄마. 생각해 봐. 내가 독서골든벨을 4등이나 해서 파티하려는 거였잖아. 근데 나는 그 자리에 없어. 그리고 엄마랑 언니는 이미 다 먹었대. 그런 내 기분이 어떻겠어?"

"그런데 내가 깨워도 네가 안 일어난 거잖아. 그리고 너는 엄마가 세팅해 둔 치킨은 보지도 않고... 엄마가 너 먹을 거 따로 충분히 남겨 놨어. 그런데 뭐가 문제야."

"엄마가 내 입장이라고 생각해 봐. 나는 기쁘게 즐길 마음이었는데 파티는 해보지도 못하고... 그런데 엄마랑 언니는 거실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둘이 웃으면서 이야기 하고... 내가 느낀 실망감, 배신감 이런 거 생각해 봤어?"

이때 아차... 싶었다. 하지만 나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네 말이 옳다고도, 내가 전부 잘못했다고도 할 수 없었다. 뭔가 억울하고 당황스럽고 화가 나기까지 했다. 그때 지난해 만났던 자녀 상담 선생님 말이 떠올랐다. "아이를 엄마와 동급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되고요,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세요. 어른이시잖아요." 

어른은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하지? 어른이 된 지 20년도 넘었고, 엄마로 산 지 17년도 넘었는데... 이럴 때 마다 나는 어른에서 더 멀어지는 기분이다. 평소라면 2호의 이런 반응에 즉각적으로 대응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지만 감정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아 어색한 침묵의 시간을 겨우 흘려보내고 나서야 말을 꺼낼 수 있었다. 호흡 한 번 깊게 하고.  

"그렇구나. 너의 그 마음까지는 생각 못했어. 그건 미안해. 하지만 엄마도 노력한 거였어. 일단 너를 두 번이나 깨웠고 너는 일어나지 않았고 그래서 너 피곤한 것 같아서 치킨도 남겨놨고."

이야기를 하다보니 우리는 같은 말을 조금씩 다르게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아이 : "엄마는 나를 왜 안 깨운 거야?" 

나 : "그래도 엄마는 치킨을 남겨놨어."

이게 뭐냐. 갑자기 현타가 왔다. 동갑내기 애들 둘이 우아하게 싸우는 것 같았다. 동시에 나 스스로는 이 상황을 굉장히 잘 대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평소와 같았다면 나는 내 감정을 있는 대로 다 뿜어내며 '내 잘못이 아니라 이건 명백히 너 때문이다'라고 했을 텐데. 이날은 아니었다. 

그건 2호의 태도 때문이었다. 이날 아이는 자신이 느낌 감정을 울먹이면서도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느끼기에 이건 변화였다. 평소에는 그러지 않았다. 이제 열세 살 아이도 자신의 감정을 잘 제어하면서 말하고 있는데, 내가 여기에 감정을 얹어서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사실 우리 둘은 성격이 비슷해서 이런 문제로 갈등이 많았다). 나는 이 상황을 잘 마무리 하고 싶었다. 

"파티를 즐기고 싶은 너의 마음까지는 엄마가 신경을 못 쓴 것 같아. 다시 미안해. 그런데 네가 일어나지 않은 이유도 있긴 해. 다음부터는 이런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 그럼 내가 너를 깨웠는데 일어나지 않으면 엄마가 어느 정도까지 해서 깨워야 해?"

"내가 확실히 일어날 때까지."

"그럼 이런 비슷한 일이 생기면 너를 침대 밖으로 업고 나올게. 그렇게까지 해서 깨워도 돼?"

"(피식 웃으며) 응."

감정이 수습된 2호는 거실에서 치킨을 맛있게 먹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제야 나도 억지로라도 깨워서 같이 먹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이런 엄마'와 사는 아이들은 어떨까 하는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파티를 즐기고 싶은 아이 마음은 전혀 몰랐던, 그저 치킨만 먹으면 된다고 생각한 이런 엄마. 요즘 말하는 MBTI로 치면 T엄마와 F아이의 차이랄까. 

[이런 엄마 이야기] 저는 공감력이 부족한가 봐요. 정말 치킨만 먹이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2호 말에 속이 뜨거워져서 혼났어요. 부끄러워서.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너도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마음도 들었지요. 억울해서.

2호와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저는 자꾸 친정엄마 탓을 하게 되요. 아직도 철이 덜 들었는지 내가 이러는 게 엄마 때문인 것 같거든요. '엄마는 내 입장에서 나를 생각해 준 적이 있었을까?' 어린 시절의 나는 왜 그런 마음을 느껴본 기억이 없을까. 저는 '받은 게 없어서 주는 법을 모른다'고 자기 합리화 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나는 이런 엄마니까 어쩔 수 없어, 그러니 받아들여라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내 생각에 의심이 들어요. 내가 엄마에게 받은 게 정말 없었을까. 내가 기억을 못하는 순간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엄마와 내가 성향이 너무 달라서 그런 게 아닐까. 그렇다면 엄마 입장에서는 굉장히 억울한 일이겠다 싶어요. 지금 제 마음처럼요. 

청소년기 이후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고 줄곧 말해 왔어요. 아이를 키우면서 어느 순간 엄마의 얼굴을 하고 있는 나를 볼 때 깜짝 놀라요. 내가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내 아이에게 그대로 해주고 있을 때 뭔가 잘 못 되었다고 느껴요. 이거 아닌데... 내 아이에게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는 말을 듣게 될까 봐 솔직히 겁이 나요.

그래서 오답노트를 적기로 했어요. 생각해보니 공부할 때만 오답노트가 필요한 게 아니었어요. 인생에도 오답노트가 필요했어요. 몰랐던 게 뭔지 정확히 알아야 다음엔 안 틀릴 테니까요. 더 잘 대응할 수 있을 테니까요. 차근차근 하나씩 적어봐야겠어요. 내가 뭘 잘하고 뭘 놓치고 있는 건지. 

이렇게 쓰고 봤더니 육아 오답노트는 서천석 선생님(소아정신과 전문의)도 권한 방법이네요. 이걸 쓰다보면 '매번 비슷한 고민 속에서 헤매다가 비슷한 결론만 내는 부모가 아닌, 하나하나 시도하면서 아이에 맞는 답을 찾아가는 성장하는 부모로 만들어 준다'면서요. 부모이자 한 인간으로서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기록하고 저를 돌아보는 이유입니다.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기자로,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연재기사를 모아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성에 대해 아는 것부터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서 성교육 전문가에게 질문한 성교육 책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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