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면 내가 옆집에 하는 일
연말이면 내가 옆집에 하는 일
  • 칼럼니스트 최은경
  • 승인 2023.12.26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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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한번 해봤어] 이웃과 나누는 정

4년 전 이 집에 이사 왔을 때다. 인테리어 사장님이 내게 비밀 하나 알려준다는 듯 속삭이며 말했다.

"옆집 아주머니가 대단하시네요. 조심하세요."

듣자 하니 인테리어 공사할 때 여러 번 민원을 넣은 모양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이사하면 조심해야겠다"가 아니라 공사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였다. 그래야 이웃의 미움을 사지 않을 테니 말이다. 공사가 끝나고 이사한 지 하루 만에 그 조심할 일이 생길지는 전혀 몰랐지만.

"띵동."

"네, 누구세요?"

"옆집인데요... 혹시 피아노 치세요?"

"아뇨, 안 치는데요(우리도 들었으니 아마도 아래층에서 치는 게 아니었을까 추정한다)."

"집에 공부하는 아이가 있어서요... 네 알겠습니다."

우와~. 옆집인데 첫 인사 치고는 셌다. 시끄럽게 하지 말라는 경고인 것도 같았다. 인테리어 사장님이 하신 말을 그때 실감했다. 그러나 더 놀란던 건 따로 있었다. 이 아파트가 층간소음에 대단히 취약하다는 것. 좀 지나친 게 아닌가 싶었던 옆집 아주머니의 반응이 이해가 갈 정도였다.

이사 오자마자 "피아노 치냐?"는 질문을 받은 이후로 MBTI가 대문자 I인 큰아이는 단 한 번도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자신이 치는 피아노 소리를 이 아파트에 사는 누군가가 듣고 있다는 게 신경 쓰인다면서. 층간소음 피해자가 되어보니 가해자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랄까. 이사 온 후로 단 한 번도 제 소리를 내지 못하던 피아노는 급기야 중고업자에게 23만 원에 팔려 우리 집을 떠났다.

집에서 공부한다는 옆집 아이는 당시 고2였다. 뭐 얼마나 대단한 공부를 할까 싶다가도 층간소음을 직접 경험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더라. 그다음 해 옆집 아이가 수능 시험을 칠 무렵이 되니 뭐라도 사서 응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평소 왕래가 있던 집도 아니라 어색해서 그냥 넘어갔는데 그게 내 마음에 남았던 모양이다. 온라인으로 떡볶이를 주문하는데 옆집 아이 생각이 난 걸 보면.

무슨 떡볶이가 어찌나 인기가 많은지 배송까지 한 달이 걸린다더라. 주문해 놓고 있으면 언젠가 오겠지 싶어 넉넉한 양을 주문했고 그걸 받은 날, 일부를 옆집 현관 앞에 놓았다. 애들 간식으로 맛있게 먹으라고 메모를 남겨두고. 그런데 뜻밖에 옆집 아주머니로부터 메모가 적힌 다정한 답례를 받았다. 뭔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고 크게 대단한 선물을 한 것도 아닌데... 뭔가 뿌뜻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옆집 아주머니는 대단한 글씨의 소유자였다. 옆집 역시 고마움의 답례를 하셨는데 그때 메모에 써주신 손글씨가 너무 예뻤다. 손글씨에 담긴 마음도 인터폰을 하실 때의 목소리와는 너무 달랐고. 특별히 오해한 건 없었지만 더 오해할 일도 없애줄 것 같은 그런 인사였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연말이면 내가 옆집 산타가 된 것은.

그 다음 해는 청송으로 여행을 갔는데 세상에 사과즙이 그렇게 맛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산지라 그런가 싸고 맛있어서 이웃과 나눠 먹으려고 두 박스를 샀다. 한 박스는 우리가 먹고 한 박스는 반으로 갈라 옆집과 아랫집과 나눠 먹었다. 그랬기에 올해도 사실 계획이 있었다.

확실하지 않지만 내 기억으로는 옆집 둘째 아이가 수능을 보는 해다. 마침 동네 베이킹 수업에서 타르트를 만든다고 해서 신청을 해두었다. 7~8개 정도를 만든다기에 몇 개는 옆집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업에 맞춰 회사도 하루 휴가를 내놓고 그날만 손꼽아 기다렸는데... 이틀 전에 취소되었다고 문자가 와서 계획이 틀어졌다. 이것만 믿고 별다른 수능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는데... 그렇게 수능일이 지나고, 수능 성적표가 나오는 날도 지났다. 현관을 나올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아, 뭐라도 해줬어야 했는데...

그 무렵 우연히 방문한 월악산 인근 숙소에서 예쁜 패키지의 사과주스를 맛보게 되었다. 이쁜데 맛있기까지 하다니. 이거 파는 건가? 검색을 해보니 온라인으로 구입이 가능하다. 이런 건 사야 해. 요즘 사과 값도 비싼데 사과 주스 한 잔에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하며 또 한 번 소비 합리화를 해본다. 한 박스를 주문하고 돌아서려는데 한 박스 더 사야겠다 싶어서 재주문. 넉넉히 사서 옆집에 주면 딱 좋겠다고 생각해서다.

1분 간격으로 추가 주문이 이상했던지 업체에서는 실수로 주문한 거 아니냐는 확인 문자가 왔고 나는 숙소 이름을 거론하면서 먹어보고 맛있어서 주문하게 되었다고, 실수가 아니니 두 박스 잘 보내달라고 문자를 넣었다. 이틀 뒤에 도착한 상자에는 이렇게 손글씨로 감사 인사를 담은 엽서가 동봉되었고.

물건을 파는 것만이 장사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 손글씨 카드. ⓒ최은경
물건을 파는 것만이 장사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 손글씨 카드. ⓒ최은경

이런 작은 것에 무조건 감동하는 나는 '올해 햇사과로 생산된 신선한 사과주스이니 맛있게 드셨으면 좋겠다'는 말에 넙죽 감사 인사를 전한다. "잘 먹겠습니다"라고. 그리고 얼마간을 옆집을 위해 따로 포장했다. 나 역시 연말 잘 보내시고 24년에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시라는 메모를 남겼다.

큰아이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 여행을 가는 길에, 학창 시절에 마니또를 하는 것처럼, 옆집 현관문 앞에 사과주스를 놓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맛있게 드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온 우리는 딸기 한 팩과 옆집 아주머니의 글씨를 또 한 번 마주했다. 별다른 내용이 없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건 역시나... 글씨가 너무 예뻐서다. 그리고 '매번 먼저 인사해 주시고 감사합니다. 보내주신 음료는 잘 먹었습니다'라고 쓰신 그 마음이 고마워서다. 이 아파트에서 인사하고 지내는 몇 안 되는 이웃이긴 하니까. 엘리베이터에서 나는 왜 자꾸 작아지는지. 마음은 그게 아닌데 어렵단 말이지.

이번 연말은 어쩐 일인지 손글씨에서 손글씨로 이어졌다. 내가 쓴 메모는 찍어둔 게 없네. ⓒ최은경
이번 연말은 어쩐 일인지 손글씨에서 손글씨로 이어졌다. 내가 쓴 메모는 찍어둔 게 없네. ⓒ최은경

생각해 보면 재밌는 일이다. 손글씨로 전한 마음이 손글씨로 계속 이어진 것이. 사과주스 사장님 입장에서 나는 그저 한 명의 고객일지 모른다. 실수로 주문한 게 아니냐고 확인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내가 먹어보고 구입한 사람이라는 걸 몰랐다면 더 반갑고 기억에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한 해 잘 마무리 하시고 내년에도 건강하시길 바란다는 손글씨를 쓰지 않았으면 옆집 아주머니의 손글씨가 이렇게 예쁘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겠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런 경우에도 통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물질이 아닌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보다 많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굳이 이런 마음을 나누고 살지 않아도 사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일 년에 한 번 옆집에 이렇게 안부를 전하는 일이 좋다. 살면서 이유 없이 그냥 하는 일 하나쯤 있을 수 있는 거잖나. 이걸 한다고 해서 옆집과 더 가까워지거나 하진 않는다. 그걸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니까. 

옆집에 살아도 마주칠 일이 거의 없고 현관 앞이나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게 전부다. 그런데 나는 이 거리가 아주 딱 좋다. 어쩌다가 옆집 아주머니와 만나도 그저 어색하지만, 아이들과 만나면 반갑게 인사한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옆집 둘째는 내년이 고3이라는 것. 다행이다. 덜 미안해해도 되겠다. 내년에는 베이킹 클래스가 취소되지 않아서 내가 만든 빵으로 응원을 해주었으면 좋겠네.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편집기자로 일하며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성교육 대화집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일과 사는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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