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좋은 부모되기
많은 부모들은 우리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그리고 어떻게 양육해야 할지, 혹여나 부모를 잘못 만나 나중에 원망을 듣지나 않을까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막막하고 답답할 때 주변의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지만, 좀 더 전문 기관을 찾게 되죠. 저는 임상 현장에서 ‘혹시 우리 아이 ADHD 인가요?, ’혹시 우리 아이 아스퍼거 아닌가요?‘, ’인터넷 찾아보니깐 우리 아이랑 너무 비슷해서요’ 라는 말을 자주 접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마치 자신이 생각했던 대답을 확정짓기 위해 명확한 대답을 듣기 원하지요.
만약 당신이 “네 맞습니다. 댁의 자녀들은 ADHD에요”라는 말을 듣는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 사실이 부모-자녀 관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물론 ADHD라는 사실이 진실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뭐가 달라질까요? ‘ADHD 맞다 아니다’가 아니라, 우리 아이의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아담스는 우울증과 자살미수로 스스로 입원하였다. 입원생활 중 다른 환자들 보다 낫다고 생각했던 그는 환자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결벽증 환자와 식사를 같이 하고 자폐증 환자와 화장실을 같이 가고 식물인간 환자에게 적극적인 감정표현을 해주었다. 변화가 생겨났다. 즐겁게 놀아주는 것만으로도 병원도 치료하지 못한 사람들이 달라졌다. 그 후 늦은 나이에 버지니아 의대에 들어간다. 그는 다른 의사들과 달랐다.
하나. 환자를 병명이 아닌 애칭으로 불렀다.
"102호실 췌장암 환자 오늘 상태는 어떤가?" (X)
"102호실 고집쟁이 데이비드씨의 오늘 몸 상태는 어때요?" (0)
둘. 환자에게 먼저 웃으며 다가갔다.
"저 환자 이름과 증상이 뭐지? 차트 좀 줘보게." (X)
"안녕하세요. 전 아담스 의사라고 합니다. 성함 좀 알 수 있을까요?" (0)
- 새벽편지 김중현 글 중 일부 -
아담스 그는 다른 의사와 뭐가 달랐던 걸까요? 그것은 편견일 것입니다. ‘결벽증 환자’, ‘자폐증 환자’, ‘췌장암 환자’라는 라벨링(labeling) 자체가 그 사람과의 소통을 어렵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환자로 하여금 희망이 아닌, 스스로 좌절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요? 우리는 간혹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이유로, 한 사람을 개념적 틀 속에 규정지어 버릴 때가 많습니다. 물론 환자를 이해하고, 전문가들끼리의 적절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진단명이 꼭 필요하겠지만, 병명은 그 이상도 이하의 의미도 없다는 것입니다. 한 아이를 ‘ADHD, 아스퍼거, 강박증’이란 틀로 이해하기에는 그 아이에겐 너무 많은 능력과 다양한 모습이 있으니깐요. 그런 의미에서 훌륭한 부모란 하나의 행동으로 그 아이를 규정짓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해하고, 수용해줄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칼럼니스트 임진은 허그맘소아청소년심리센터 노원센터 임상심리전문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