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단 잘 한다고 인생 피는 게 아니다
예단 잘 한다고 인생 피는 게 아니다
  • 칼럼니스트 전혜진
  • 승인 2014.02.04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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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께 손 벌리고 더러는 빚까지 지며 무리하지 말자

[연재] 결혼문화 'Something four'

 

지난 주말은 민족의 명절이라는 설 연휴와 맞물려 있었다. 고향에 돌아가는 사람도, 고향에 들렀다가 부모님과 함께 다시 친척 집으로 이동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리라. 세뱃돈을 받으면서 그런 말을 들으면 그나마 억울하지나 않지, 나이 들었다고 이제 세뱃돈을 받기보다는 조카들에게 뿌려야 하는 입장인데 ‘부모 형제 일가친척이 서로서로 아직도 학교 다니냐’, ‘결혼은 언제 하느냐’, ‘결혼을 했으면 아이를 낳아야지’, ‘애가 있으면 둘은 낳아야 하지 않겠니’, ‘집은 언제, 차는 언제 사느냐’는 투의 걱정을 빙자한 스트레스나 주고 받으니, 명절이 이제는 달갑지만도 않은 것이 사실이다.


어릴 때부터 내 성장을 지켜봐 온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도 끔찍한데 재작년 결혼한 새언니는 서른 살 이전의 자기 자신에 대해 손톱만큼도 모르는 사람들이 쏟아내는, 애는 언제 낳고 집은 언제 사고, 회사에 다녀도 남편 뒷바라지는 남부럽지 않게 해야 하지 않느냐는 폭언 아닌 폭언을 들으며 구석에서 전을 부치고 쉴 새 없이 과일을 깎아내고 있다. 다음 명절에는 시댁에 끌려오는 대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출근하고 말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듯 심각한 얼굴을 하고.


명절에 볼 수 있는 이런 풍경만 아니라도, 결혼을 결심하기가 조금은 쉬워질지도 모르겠다. 내가 자라온 것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 다른 분위기에서, 피 한 방울 안 섞인 낯선 시댁 친척들에게 온갖 수발을 드는 것도 모자라 가당치도 않은 잔소리들을 듣는 이 현실은, 막장드라마만큼 피와 살이 튀지는 않는다 해도 어디로 보아도 마땅치는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렇다 보니, 정말 결혼할 때 예단 같은 것이라도 푸짐하게 해서 보내야 뒷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어찌 보면 합리적인 판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해도 안 해도 나올 말은 다 나온다는 것.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성의가 없다’, ‘우리 집안을 무시한다’고 욕을 먹겠지만, 무리를 해서라도 거하게 시댁에서 요구하는 대로 다 해간다 해도 그 약발이 1년을 넘어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잘난 척한다는 뒷말이나 없으면 다행이고, 오히려 그다음에 결혼하는 사람들에게 비교 대상이나 돼 원망만 살 뿐이다.


예단이란 예를 다하기 위해 보내는 비단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지만, 이것이 신부가 시댁으로 바리바리 선물과 현금을 보낸다는 뜻은 아니었다. 신랑 쪽 집안에서 신부에게 먼저 비단을 보내면 신부가 시부모님의 옷을 지어 올려 신부의 정성과 바느질 솜씨를 보이는 풍습이었다. 애초에 전통을 따지자면, 재물이 아니라 정성이었다.


신분제도가 무너지고, 급속히 부를 쌓은 계층들이 가난하지만 뼈대 있는 양반 집안의 사위를 맞거나, 현대에 와서는 의사, 판검사 사위를 맞으며 벌어진 일들이 소위 대세가 되는 데는 백 년도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현금예단을 따로 하는 풍습도 없던 것이, 이런 호화 혼수를 가정의례준칙으로 금하자 현금이 오가다가, 가정의례준칙이 사문화되자 전통이랍시고 현금은 현금대로, 혼수는 혼수대로 따로 이중과세를 하게 된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예단비 시세라는 게 형성되고, 내가 이만큼을 해 줬으니 나도 이만큼은 받아야 하지 않느냐는 심리로 밀고 당기며 결혼준비가 아수라장이 되는 일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분명히 말한다. 욕을 먹어도 약발을 받아도 고작 1년이다. 길게 가야 2, 3년이다. 개천 속의 시댁을 시집오는 며느리가 일으켜 세운 게 아닌 이상, 그런 것을 해 준다고 설에 전을 덜 부치는 것도, 가슴에 송곳을 탁탁 꽂는 잔소리를 아니 듣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잘하나 못하나 뒷말이 없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 그런 일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단 것 드시면서 새 사람 흠 잡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딸을 시집보낼 때 시댁에 입막음 엿이나 입막음 떡 같은 것을 보내는 풍속까지 있었던 것이다.


물론 현실에는 드라마 속 시월드같은 막장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요즘 시부모님들 중에는 쿨한 분들도 많다. 하지만 당장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명절 풍경 속에서, 한 가지 서글픈 깨달음을 얻어 보는 것은 어떨까. 예단, 그거 받을 때는 좋아도 계속 생색나고 그런 것 아니다.


남들이 겁을 주는 만큼, 시부모님이 원하시는 만큼, 그 많다는 친척들을 두루두루 만족하게 할 만큼 등골이 휘어지게 애를 써서 보낸들, 그런 것을 보낸 만큼 시댁에서 내 입지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저마다 예단으로 보내는 물목들은 제각각이겠지만, 결혼해서 명절에 겪는 풍경들은 대개 비슷비슷하니까.


어차피 그런 것이라면, 부모님께 손 벌리고 더러는 빚까지 지며 무리하지 말자. 마음 닿는 만큼만 하자. 자기 힘으로 결혼준비를 하고 있어 예산이 빠듯하다면, 차라리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예단을 줄이든가 없애버리자. 차라리 없으면 없는 대로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시댁에서 제 입지도 챙기는 법이다. 언제까지, 등골 휘어가며 생색 안 나는 이런 일을 전통이라고 자손만대 이어줄 것인가.

 

*칼럼니스트 전혜진은 수학과 기계공학과 컴퓨터과학을 전공한 내추럴 본 공돌이이자 퇴근 후에는 SF소설과 만화 스토리를 쓰는 작가다. 주변의 온갖 것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메모하는 것을 즐기며, 자신의 결혼과정을 꼼꼼히 메모하며 생각했던 일그러진 결혼문화들을 '천만원으로 결혼할 수 있을까'라는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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