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할 때는 다 떨어" 이런 말은 너무 흔하니까
"발표할 때는 다 떨어" 이런 말은 너무 흔하니까
  • 칼럼니스트 최은경
  • 승인 2017.09.26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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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한번 해봤어] 남 앞에서 말하기

"딸, 이따 엄마 공개수업에 갈게."


열한 살 딸아이는 별 말이 없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아닌가? 갑자기 긴장감이 몰려왔다. 공개수업에 가려고 굳이 연차까지 썼는데 안 가도 될 것 같은, 반기지 않는 이 분위기는 뭐지? 궁금하던 찰나. 딸이 운다. 또르르 눈물이 흐른다. 눈 주변이 빨개졌다. 꼬 끝이 붉어졌다.


"왜 울어? 엄마가 가서 좋아서 우는 거야? 감동받았어?"


일부러 농담을 던졌다. 딸은 '피식' 하며 웃는다. '심각한 건 아니군' 안도했다. 우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전히 말이 없다. 이럴 때 엄마의 직감은 무섭다. 왜 우는지 알 것 같았다.


"혹시 너 오늘 발표해?"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 맥이 풀렸다. 예기치 않은 '긴급 조찬 회의'가 열렸다. 아침 밥상을 앞에 두고 엄마아빠 어렸을 적 기억들을 소환했다. 선생님이 발표를 시킬까 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기억, 어떻게든 선생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무리에 파묻혀 있던 일 등. 지금도 그렇다고 서로 고백을 자처했다. 우리도 너와 다르지 않다고. 원래 긴장하면 그렇다고. 지금도 회사에서 뭘 발표하라고 하면 손에 땀이 난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다 그런다고. 아이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베이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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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딸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생각했다. 1학년 때는 2학년이 되면 달라지겠지 했는데 역시나 였고, 2학년 때는 3학년이 되면 달라지겠지 했는데, 또 역시나였다. 4학년 때는 급기야 울기까지 하다니. 이걸 어떡하나. 이렇게 막연히 기다려주는 게 맞는 걸까? 걱정되고 속상하고 우울하고 그런 복잡한 마음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며칠 후 회사로 강의 요청이 들어왔다. 서울 강동구 평생학습원이라는 곳에서 시민기자 학교를 여는데, 내가 일하는 편집부에서 그걸 맡아줬으면 한다는 거다. 부장은 다른 때와 달리 편집기자 모두가 참여했으면 좋겠다며, 우선 하고 싶은 사람을 지원받겠다고 했다. 평소 같았으면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거 못하는 사람이니까. 관심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자꾸 발표를 힘겨워하는 딸아이가 생각났다.


"엄마 나는, 발표할 때 내가 불 속에 있는 것 같아. 내가 발표할 때 사방이 고요해지는 그 순간이 너무 싫어. 정말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공개수업이 지나고 한참 후에야 아이는 자기만의 언어로 그 힘든 순간을 말해줬다. 그런 아이에게 더 이상 '괜찮아 다 그래', 이런 흔한 말을 해주고 싶진 않았다. 뭔가 다른 말을 해주고 싶었다. 마침 그때 부장이 카톡을 보냈다. '한번 해보지 않을래?' 내 인생에 없던 계획을 수정했다. 딸에게 엄마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발표 그거 엄마가 한번 해봤더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해보자.'


강의는 분명 그날로부터 한 달 후였는데,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이제 일주일 남았다. '무엇을 쓸 것인가'를 주제로 강의를 하고 싶다고 담당자에게 전달했다. 자료를 찾고 읽으며 강의안을 준비했다. 심장은 벌써부터 때때로 두근거렸다. 강의 시간 10분 전도 아니고, 일주일 전부터 뛰는 심장. 딸아이 말대로 내 심장도 터질 것 같았다. 딸아이와 잠자리 시간, 무심코 속엣말이 나와버렸다.


"아, 엄마 다음 주에 강의하는데 잘할 수 있을까?"

"(깜짝 놀라면서) 엄마 강의해?"

"응. 글쓰기 강의. 무엇을 쓸 것인가로 시민기자에게 설명해주는 거야. 야, 근데 벌써 떨린다."

"엄마, 그냥 연습한다고 생각해. 거기에 엄마밖에 없다고 생각해봐."


뭐지 이건? 딸아이 입에서 믿기 힘든 격려의 말이 흘러나왔다. 내 기분을 공감해주고, 위로해주고, 격려해줬다. 뭉클했다. 할까 말까 수백 번 고민했는데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아이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내가 원한 걸 이미 다 이룬 것 같았다. 강의를 잘 하지 않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화를 이어갔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발표했어?"

"응."

"그럼 좀 나아?"

"응."

"오케이 좋았어, 엄마도 한번 그렇게 생각해볼게."


오케이는 개뿔. 강의 하루 전. 폭발했다. 강의안 마무리 단계인데, 자꾸 프로그램이 다운이 돼서다. 


"아!(비명에 가까운)... 내가 왜 이걸 한다고 했을까?"


잠자리에서 딸아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그 강의안 보고 강의하는 거야?

"응... 근데 잘할 수 있을까 모르겠어. 심장이 두근두근 해. 수강생이 25명 정도라니까 50개의 눈이 엄마를 볼 거 아냐. 아~악. 생각만 해도 떨려."

"엄마, 그럼 그 사람들 얼굴에 강의안이 붙어 있다고 생각해. 그럼 눈이 안 보이잖아. 그럼 좀 덜 떨리지 않을까."

"뭐? 하하하. 그럼 그 붙은 강의안 보면서 강의하고?"

"응!"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야."


아이는 내가 잠시 잊고 있었던 걸 다시 생각하게 했다.


'그래, 강의를 잘하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아이 마음을 알아주고, 아이가 내 마음을 알아준 이 순간 우리가 서로 공유한 느낌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너무 욕심 내지 말자.'


강의 날 아침, 이런 마음은 싹 사라졌다. 심장 뛰는 소리가 계속 귓전을 때렸다. 그래도 청심환은 먹지 않았다. 걱정과 달리, 큰 실수 없이 강의를 마쳤다. 핸드폰을 보니 큰아이에게 부재중 전화가 3통이나 와 있었다. 내가 그렇게 걱정됐나? 부랴부랴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안... 엄마가 전화를 못 받았네?"

"응, 엄마 언제 와?"

"이제 강의 끝났어. 밥 먹고 가려고."

"응... 알았어."

"(뚜뚜뚜뚜.)"


뭐야? 그냥 끊은 거야? 엄마 잘 했냐고 물어보지도 않네? 전화는 끊겼지만 딸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랬다.


'그래도 딸, 고마워. 잘 했냐고 물어봐 주지 않아서. 사실 어떻게 말해야 하나 좀 고민했거든. 엄마 좀 떨긴 했는데, 10분 정도 지나니까 괜찮았어. 사람들 시선 피하는 거보다 자연스럽게 눈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게 더 좋더라. 딸 덕분에 엄마가 정말 좋은 경험을 했어. 너도 언젠가 이 스릴을 '즐기게' 되는 그런 날이 오길 바라. 그때까지 엄마가 힘이 되어줄게.'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편집기자로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연재기사를 모아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2017년 5월 1일)를 펴냈습니다. 두 딸과 함께 읽으며 울고 웃은 그림책을 소개하고, 아이에게 전하고 싶은 엄마의 마음을 글로 씁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함께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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