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면서 배우고 놀면서 자라고 놀면서 자신을 찾아가는 아이들
놀면서 배우고 놀면서 자라고 놀면서 자신을 찾아가는 아이들
  • 칼럼니스트 김보민
  • 승인 2021.04.28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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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에서 지구인으로 살아가기] 아이들 뒤를 쫓아가며 나도 놀고 배우고

싱가포르에는 야외 놀이터가 많다. 처음에 싱가포르에 왔을 때 놀이터를 찾아 다니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아이와 부모 모두 좋아하는 곳은 분수처럼 물이 솟아 나오는 놀이터이고, 아주 길다란 미끄럼틀이 있는 놀이터, 정글처럼 커다란 그물망이 있는 놀이터도 인기 만점이다. 야외 놀이터는 대부분 무료이고, 한낮에는 늘 무더운 날씨 탓에 사람이 많지 않은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우리 식구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터는 싱가포르의 세종문화회관이라 할 수 있는 에스플러네이드(Esplanade) 옆에 있는 놀이터이다. 그네를 타면 저 멀리 마리나 샌즈 베이 호텔과 느리게 흐르는 강물과 그 위를 둥둥 떠다니는 요트를 볼 수 있다. 널따란 잔디밭을 가로질러가면 싱가포르 내셔널 갤러리가 있어 어린이 코너에서 아이들은 다양한 종류의 미술 체험을 할 수 있다. 조금 더 걸어 씨티홀 쇼핑몰에 가면 실내에서 식사도 하고 쇼핑도 할 수 있다.

에스플러네이드 놀이터에서 우리 식구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모래 놀이와 그네! 보슬보슬한 모래 위를 맨발로 뛰어다니며 발바닥이 따뜻할 때까지 놀고, 모래성을 쌓고 막대를 하나 꽂아 두고 서로 모래를 뺏는 모래성 게임을 하며 깔깔거리는 시간은 모래가 없이 얻을 수 없는 큰 재미다. 나와 큰 아이는 그네 타기 선수인데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발을 굴려 그네를 탈 때 느껴지는 바람, 멀어졌다 가까워지는 하늘, 새 깃털만큼 가벼워져 하늘을 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역시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다.

얼마 전, 싱가포르의 동쪽 바닷가에 있는 이스트 코스트 파크(East Coast Park)에 새로운 놀이터가 생겼다는 반가운 소식에 아침을 먹자마자 온 식구가 길을 나섰다. 우리도 나름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새로 생긴 놀이터답게 이미 엄청난 인파가 몰려 있었다. 놀이터에서 놀 엄두가 나지 않아 아이들은 가져간 킥보드를 타며 해안가를 산책하기로 했다. 아이들은 산책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아이들 얼굴에 실망했다는 표정이 드러나는 순간 얼른 해변으로 항했다. 처음에 우리는 모래에 앉아서 모래성을 쌓고 조개 껍데기를 줍고 파도를 바라만 보며 놀았다. 그래도 바닷가에 왔으니 바다에 손 발은 한번 담가 보자며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발목까지 바닷물에 담그고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바닷를 느꼈다. 큰 아이가 손을 씻겠다고 상체를 숙이며 살짝 앉았는데 들이닥친 파도에 엉덩이가 살짝 젖었다. 

아이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다가 바다 위 태양만큼 환하게 웃으며 바닷물에 털썩 주저앉았다. 본격적인 놀이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바지가 다 젖고, 티셔츠가 다 젖고, 바닷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미역처럼 아이 얼굴에 착 달라붙었다. 그 때부터 우리는 바다에서 놀려고 작정하고 온 사람들처럼 놀았다. 누군가 버리고 간 장난감을 주어다 땅을 파기 시작했고, 파도를 따라 올라온 바닷물이 다시 바다로 향하는 수로를 만들었다. 수로가 무너지면 더 단단하게 정비를 했고, 수로 옆에는 파도에도 무너지지 않을 모래성을 쌓았다.

어여쁜 구름 아래 보드라운 모래를 어찌 그냥 두고 갈 수 있을까? ⓒ김보민
어여쁜 구름 아래 보드라운 모래를 어찌 그냥 두고 갈 수 있을까? ⓒ김보민

온몸이 땀과 바닷물에 다 젖었고 장시간의 모래사장 노동으로 인해 배가 살짝 고파올 무렵이었다. 공원에 있는 야외 샤워대에서 아이들을 대충 씻겨 옷을 갈아 입혔다. 나와 남편의 마음에는 여름 바다 모래 사장이 배경인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듯 놀이의 끝이 보이는데 아이들은 아직 놀이의 흥분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공원의 자전거 도로를 달리는 4인용 자전거를 가리키며 타고 싶다고 조르기 시작했고, 30분을 기다려 가족 자전거 한 대를 배정받았다.

한시간 동안 나와 남편은 허벅지가 터질 듯 페달을 밟았다. 흥이 난 아이들은 끝없이 노래를 불렀고, 우리와 마주치는 세상 모든 자전거에 인사를 건넸다. 한여름 햇볕 아래 몇 시간을 놀다가 자전거를 타니 모든 게 좋았다.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왔고, 잔잔한 바다와 빌딩만 한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고, 아이들의 노래소리는 달콤했다. 비록 허벅지는 많이 아팠을 지라도. 

자전거를 반납하는 시간에 맞춰 바다 저 멀리서 먹구름이 들이닥쳤다. 자전거에서 내리는 순간 어마어마한 비가 쏟아졌다. 바다에 떠 있는 배 한 척이 안 보일 정도로, 빗방울이 하도 굵어서 맞으면 아플 정도의 비였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자전거 보관소 처마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아이들은 그제서야 배가 고프다고 했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져간 해바라기씨를 쉴 새 없이 까서 어미새가 새끼들에게 먹이를 주듯 아이들 입에 넣어 주었다.

비가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고 배가 고파 쓰러지기 전에 집에 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빗속을 달려 버스 정류장을 찾아갔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달랑 하나 있는 버스는 운행을 하지 않았고, 어떻게 해야 할 지 도통 방법이 떠오르지 않던 그 순간 택시가 잡혀서 가까스로 집에 왔다. 택시에서 잠든 아이들을 들쳐 업고 집에 올라와 온 몸에 묻은 모래를 씻어내고 따뜻한 라면을 끓여 호로록 나눠 먹었다.

우리 외출가방은 항시 무겁다. 여분의 옷, 간식, 하루 온 종일 마실 물...지구 끝까지 달려갈 마음으로 모두 짊어지고 다닌다. ⓒ김보민
우리 외출가방은 항시 무겁다. 여분의 옷, 간식, 하루 온 종일 마실 물...지구 끝까지 달려갈 마음으로 모두 짊어지고 다닌다. ⓒ김보민

새로 생긴 놀이터에 가서 놀자는 마음으로 나선 길이었는데 놀이터는 근처도 못 가보고 보낸 하루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래를 뒤집어쓰고 멀리서 바라볼 생각이었던 바다에 풍덩 빠져 정신없이 놀았다. 가족 자전거는 늘 대기자가 많아 나중으로 미루기만 했는데 엉겁결에 온 식구가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달렸다.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세차게 내리는 비를 맞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는데 그 비를 온몸으로 만끽하며 그 넓은 공원을 뛰어다녔다. 

그래서 결론은? 행복했다.

고생스러운 하루 같지만 한낮의 태양 아래 땀이 줄줄 흐를 때도, 바닷물에 옷이 젖고 온몸에 모래가 덕지덕지 붙어 있을 때도, 자전거 페달을 밟느라 허벅지가 터질 것 같을 때도, 큰 비에 앞이 안 보일 때도 다 행복했다. 세상에 이런 우연들이 모이고 모여서 예상하지 않은 즐거움, 어여쁨, 발견을 만끽할 수 있으니까. 정답이 보이고 결론이 뻔한 이야기가 재미없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넷은 각자 오늘의 어떤 순간을 기억하고 추억하고 살아갈까? 같은 시간과 공간을 함께 했어도 각자 보고 느낀 것은 다르고 다른 생각을 하고 살아갈 테니 말이다. 나중에 시간이 많이 흘러 오늘 기억을 끄집어내며 어떤 순간이 가장 즐거웠냐고 식구들에게 물어 보고 싶다. 그때도 따뜻한 라면 한그릇을 김치랑 같이 먹으면서.

우연이 이끄는 그대로,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간들 그대로, 다가온 시간을 오늘이 끝인 것 마냥 온전하게 즐기며 아이들과 놀고 싶다. 그렇게 정성껏 놀아야 정성껏 살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 

아이들은 놀면서 배우고 놀면서 자라고 놀면서 자신을 찾아간다. 아이의 뒤를 쫒아 가면서 나도 놀고 배우고 자라고 나를 찾고 있다.  

*칼럼니스트 김보민은 '한국땅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산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라는 호기심으로 2년째 싱가포르에 체류 중이다. 싱가포르에 올 때 4살이던 첫째와 생후 2개월이던 둘째는 어느덧 각각 6살, 26개월로 훌쩍 자랐다. 365일 여름이고, 아시아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주로 영어를 쓰고, 작은 나라이면서도 어마어마하게 큰 아시아를 가르쳐주고 있는 싱가포르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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