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치마·공주… 성평등 엄마도 막지 못한 '핑크기'
분홍·치마·공주… 성평등 엄마도 막지 못한 '핑크기'
  • 김재희 기자
  • 승인 2020.04.06 17: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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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그림책 「잘 노는 숲 속의 공주」 쓴 웹툰작가 미깡

【베이비뉴스 김재희 기자】

미깡 작가의 자화상 ⓒ미깡
미깡 작가의 자화상 ⓒ미깡

아이들은 육아서적에 나오지 않는 그 어떤 시기를 거친다. 이름도 까마득한 공룡 학명을 줄줄 외워대는 ‘공룡기’가 있고, 바퀴 달린 그 무엇만 보면 눈을 떼지 못하는 ‘자동차기’ 혹은 ‘붕붕기’가 있다.

여기에, 한국 아이들은 우연처럼 또 하나의 기간을 거친다. 분홍색을 보호색인 양 두르고 다니는 ‘핑크기’가 그렇고, 드레스와 왕관의 유혹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공주기’가 바로 그때다. 어디서 옮아왔는지 모르게 어느 날부터 갑자기 아이는 핑크를 찾고 리본과 드레스를 찾는다.

특히 육아에도 성평등이 중요한 요즘, 아이에게 무심코 던지는 말 하나에도 신경을 썼던 부모라면 이 근본 없는 핑크기와 공주기에 이마를 짚게 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닐 터. 2013년 '겨울왕국'의 엘사가 한반도에 상륙하면서 한국 아이들의 ‘핑크기’는 어느 정도 사라졌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약속한 듯 그 기간을 거친다.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라고 했던 황지우 시인의 글처럼 그 기간을 지나는 아이들은 핑크 물건들을 방 안 가득 폐허처럼 쌓아두고 또 다른 취향을 향해 떠난다. 마트에서 울며불며 대치하게 만들었던 시간들이 무색하다.

다음 웹툰 「술꾼 도시 처녀들」로 술 좋아하는 ‘도시 처녀들’의 일과 사랑을 다루며 2030 여성들의 많은 공감을 샀던 미깡 작가. 미깡 작가가 결혼까지의 과정을 웹툰으로 담아낸 「하면 좋습니까」에 이어, 이번엔 육아 경험을 녹인 책을 냈다. 2월 20일 출간된 「잘 노는 숲 속의 공주」(후즈갓마이테일). 이번엔 웹툰이 아니라 그림책이다. 미깡 작가가 글을 쓰고 스페인 작가 신타 아리바스가 그림을 그렸다.

책은 핑크색과 공주 드레스를 좋아하던 아이가 꿈속에서 예전 숲 친구를 만나면서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을 찾게 되는 이야기를 다뤘다. 다정한 글과 대담하고 유쾌한 그림을 한꺼풀 걷어내면, 딸 키우는 양육자로서의 고민이 진하게 느껴진다. ‘이왕 막지 못할 것, 잘 구슬려 보자’는 간절함이 느껴지는, 예방접종 같은 동화를 쓴 미깡 작가와 베이비뉴스는 서면인터뷰를 진행했다.

◇ "딸의 ‘핑크기’에 절규했지만… 아이 마음 부정할 수 없어"

2월 발간된 미깡 작가의 그림책 '잘 노는 숲속의 공주' ⓒ후즈갓마이테일
2월 발간된 미깡 작가의 그림책 '잘 노는 숲속의 공주' ⓒ후즈갓마이테일

Q. ‘공주’를 주제로 했을 때, 원고 쓰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아요. 이 이야기를 어떻게 구상하게 되셨나요?

“처음에는 ‘옷’에 포커스를 맞췄어요. 이 기획이 시작된 게 지난해니까, 딸이 여섯 살이었는데 그때 한창 핑크색 드레스만 입겠다고 투정을 부렸거든요. 아이가 성역할 고정관념에 빠지지 않도록 양육과정에서 온갖 노력을 다 했는데 내 딸에게도 결국 핑크기가 찾아오니 당황스러웠어요. ‘내 딸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난 이렇게 안 키웠는데!’ 절규하는 거죠(웃음).

근데 저뿐 아니라 많은 부모가 같은 경험을 한다는 걸 알게 됐고, 이런 양육자의 마음도 담아보고 싶었죠. 처음에는 핑크색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고집하는 아이와 그게 못마땅한 엄마가 등장해서 옥신각신하는 걸로 시작했어요. 엄마 눈에 아이 옷이 못마땅한 것처럼 아이 눈에도 엄마의 옷은 단조롭고 재미없죠. 핑크색을 좋아하는 아이의 마음과 엄마의 현실적인 고민을 동시에 담아보려 했어요. 

막상 써보니 어른의 잣대로 자꾸 판단하는 말들이 들어가는 거예요. 핑크를 좋아하는 게 아무리 사회적 학습의 결과라 하더라도 아이의 현재 취향, 마음을 부정하는 식으로 그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초고는 접고, 어른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는 이야기로 새로 쓰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공주 모티브가 추가가 됐고요.”

Q, 책에서도 작가님이 경험한 마음고생이 은유처럼 녹아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핑크 드레스 입기나 리본 매기를 고집하던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다섯 살 때부터 그랬던 걸로 기억해요. 친구들의 이름을 대면서 ‘누구는 맨날 예쁜 치마 입고 온다’, ‘누구는 유리구두 신는데 나는 왜 운동화만 신냐’고 볼멘소리를 시작했어요. 당황스러웠죠. 저희 집은 거의 ‘핑크색 금지 구역’이거든요. 

TV를 봐도 남녀 동수가 맞지 않거나 여자가 수동적이고 보조적으로 나오는 만화는 지양하고 능동적인 여자 캐릭터가 주인공인 만화를 골라서 봤고요. 그래야 그나마 균형이 맞을까 말까 하니까요. 꽤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핑크기가 오니까 ‘현타’가 왔죠(웃음). 

생각해보면 아이들에게는 친구가 너무 중요하고 또래문화라는 게 있으니까, 그 이상 제가 나서서 통제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원하는 대로 핑크색 치마도 입게 하고, 머리카락도 길러보게 했어요. 화장만은 절대 금물이지만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핑크기에서 벗어나겠지요. 요즘은 심하게 고집하지는 않아요.”

Q. 책이 나온 후에 ‘잘 노는 숲속의 공주’를 자녀와 읽어보셨나요? 함께 읽기를 할 때 아이는 어떤 부분을 좋아하던가요? 

“딸이 아직 핑크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드레스, 리본, 유리구두가 나오는 장면을 좋아하더라구요(웃음). 이 책이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는 했지만 모른 척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저도 채근하진 않았어요. ‘그래, 드레스 예쁘다~ 그런데 바지를 입으니까 진짜 편해 보이고 친구 표정이 너무 즐거워 보이네?’ 옆에서 이렇게 말하는 정도죠.”

◇ 아이는 스스로 답 찾을 수 있다… "어른들이나 잘해야죠"

책은 핑크색과 공주 드레스를 좋아하던 아이가 꿈속에서 예전 숲 친구를 만나면서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을 찾게 되는 이야기를 다뤘다. ⓒ후즈갓마이테일
책은 핑크색과 공주 드레스를 좋아하던 아이가 꿈속에서 예전 숲 친구를 만나면서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을 찾게 되는 이야기를 다뤘다. ⓒ후즈갓마이테일

Q. 이번엔 고전동화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가지고 작업을 하셨습니다. 도전해보고 싶은 고전이나 동화가 또 있나요? 만약에 있다면, 어떤 방향으로 바꿔보고 싶으신가요?

“이번에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모티브로 삼은 건 디즈니 공주 스토리 중에서 가장 답답해서였어요. 공주가 예쁘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개성도 없고 수동적이잖아요. 마법에 걸려 잠들고, 왕자가 와서 깨워줄 때까지 아무 것도 하는 게 없죠. 「백설공주」나 「신데렐라」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고전동화가 가진 문제점은 이미 다들 잘 알고 계시고, 이번에 이런 시도를 해봤으니, 기회가 된다면 또 다시 인용하기보다는 아예 새로운, ‘지금 이 곳’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습니다.”

Q. 신타 아리바스의 생동감 넘치는 그림이 작가님 글과 잘 어울립니다. 그림작가로 신타 아리바스가 정해졌을 때 어떤 점을 기대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책 속 신타 아리바스의 그림 중에 특히 마음에 드는 장면을 하나 골라주세요.

“신타 아리바스 작가님 그림에서 가장 좋은 건 아이들의 표정이에요. 제가 어릴 때 본 그림책들에서 여자 아이들은 다소곳하고, 예쁘고, 거의 언제나 상냥한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반면 신타 작가가 그리는 아이들은 무표정하기도 하고 새침하기도 하고 개구지기도 하죠. 그게 너무 자연스럽고 건강해서 좋았어요. 이번 책에서도 역시 아이들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가 개성 넘쳤고요.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은 역시 주인공이 마침내 좋아하는 옷을 꺼내 입고 활기차게 뛰어노는 장면이죠. 이때 ‘나’의 표정이 확 밝아지는데, 독자들도 함께 웃게 되거든요. 단순히 편하다는 걸 넘어서서 잃어버렸던 자신을 찾은 듯한 ‘희열’이 표현되길 바랐고, 신타 작가님께도 가장 공들여서 설명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잘 표현되어서 아주 만족합니다.”

Q. 이 책을 읽는 독자, 그러니까 아이들과 부모님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지요?

“이 책은 어른인 나의 고민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책 속에는 어른이 등장하지 않아요. 어른이 나서서 아이에게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아도, 아이는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어요. 아이가 스스로 길과 답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어른들은 속이 터지더라도 꾹 참고 인내심을 발휘하면 좋겠어요. 아이들은 뭐, 지금처럼 신나게 잘 놀면 됩니다. 당부할 건 없어요. 어른들이나 잘해야죠.”

Q. 육아기간에 성역할 고정관념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받은 책이나 영상물이 있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이것저것 읽어줬는데 아이가 가장 좋아하고 잘 받아들인 책은 「메리는 입고 싶은 옷을 입어요」예요. 지금도 아주 좋아해요. 영상물은 TV 시리즈 「페파 피그」. 여기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남자가 요리를 하고 여자가 중장비를 몰아요. 누나는 대범하고 남동생은 수줍음이 많죠. 굉장히 편견이나 혐오 표현도 없는데다 재미까지 있어서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는 데 아주 좋은 교재라고 생각해요.”

Q.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이 자랄 한국은 어떤 모습이기를 바라십니까?

“당연히, 두말할 것도 없이 성평등한 사회죠! 성별에 구애 받지 않고, 차별 받지 않고, 누구나 하고 싶은 걸 하고 살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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